황주리 그림소설, 사랑·인생 발랄하게 통찰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

화가 황주리가 그림 속 이야기들을 소설로 펼쳐냈다. 그의 두 번째 소설집 '한 번, 단 한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는 사랑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어쩌면 지구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의 모든 사랑 유전자를 담아 오늘까지 지속되어 온, 사물과 식물과 동물과 우주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짝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고.

이 소설집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 중 '바오밥 나무를 좋아하세요?', '내 사랑, 체 게바라' 두 편을 읽었다. 이 두 편은 지리적, 정치적 공간을 넘나들며 상상력을 넓혀준다.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혁명의 열기가 들끓었던 북한과 쿠바가 등장한다. 이 두 편은 각기 자연적· 정치적 공간에서 인간의 사랑이 어떻게 엮어지는지, 그 사랑의 과거와 현재, 미래는 어떻게 되는지 펼쳐 보인다. 그 사연들은 깊은 슬픔을 간직하면서도 발랄하게 펼쳐진다.

'바오밥 나무를 좋아하세요?'는 미국에 입양된 한국인 입양아 데이빗의 사랑 이야기이다. 경비행기 조종사인 그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선교사들을 오지에 실어나르는 '파일럿 선교사'를 한다. 바오밥 나무와 사막과 쏟아지는 별들에 매료된 그는 이곳을 찾은 엘리노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지만, 어떤 충격으로 엘리노어는 우울증을 겪다가 그와 헤어지고 만다. 이후 한국인 선교사들 중에서 남편과 함께 나타난 선이라는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어머니의 모습을 꼭 빼닮은 그녀. 사고로 선이의 남편이 죽고, 선이와 데이빗은 죽은 이를 추모한다. 선이와 데이빗은 한국의 선이 가족을 방문한다. 데이빗은 꿈속을 오가며 선이가 가족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꿈속의 장면은 바뀌어 전처 엘리노어가 정겹게 등장하고, 양부모가 인자한 웃음으로 맞아 주며 이 단편은 끝난다. 여기에서 이별과 사랑은 윤무와도 같이 인연의 고리를 이어가며 화해에 이른다. 이들에게 입양, 이혼, 죽음은 이별이라는 고통을 안겨주지만, 새로운 인연을 만남으로써 그 고통을 넘어서는 위안을 얻는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 인연을 저버리는 건 아니다. 악한 인연을 선한 인연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인생임을, 이에 필요한 것은 사랑임을, 대가 없이 베푸는 짝사랑임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우리는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을 늘 안고 산다. 이 단편에서 죽음 속에 젊음이 있고, 늙음 속에 삶이 있다는 작가의 통찰이 빛난다. 이 통찰은 시간과 기억의 차원에서 가능한 일이다. 기억 속에 살아 있음은 죽음을 넘어서게 하고, 늙음이란 삶의 고통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기회를 주기에.

"이름 그대로 '사랑의 바오밥'이라 이름 지어진 그 특별한 바오밥 나무는 운 좋게 만난 어느 두 사람처럼 영원히 얽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운이 좋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바오밥(데이빗의 애칭)은 사랑하는 선이가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아무르 바오밥'을 올려다보는 그 슬픈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죽은 사무엘을 질투했다. 바오밥 나무를 보러 온 건 사실 선이와 함께 단둘이 바라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들 곁에는 늘 사무엘이 있었다. 죽은 사람을 질투하는 건 참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결코 그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히 젊고 아름다우며 절대 늙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늙음이란 인간이 타고난 형벌이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먹으면 늙음이란 어떤 정신의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본문 232쪽)

'내 사랑, 체 게바라'는 탈북자 여성이 쿠바 남자와 연정을 통해 자유를 꿈꾸는 이야기이다. 북한 여성 태옥은 미술학도로서 북한 주재 쿠바 대사의 아들 호세와 마주친 순간 가슴에 그를 품게 된다. 그녀에겐 위기에 처한 가족을 살려준 남편이 있었지만, 호세와 대면 이후 그만을 그리워하게 된다. 태옥은 그로부터 주체사상탑 앞에서 만나자는 쪽지를 받지만, 감시를 의식해 약속 장소에 나가지 못한다. 호세는 체 게바라를 그대로 닮았고, 태옥과 그녀의 딸에게 그는 체로 불리며 체 게바라만큼 숭배의 대상이다. 태옥 모녀는 미국으로 들어가 살지만, 그녀의 딸은 대학 총기 난사 사건으로 목숨을 잃는다. 태옥은 체의 나라 쿠바를 방문해 그를 만난 듯한 상념에 빠지며 이 단편은 막을 내린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수립된 두 국가와 그 나라의 두 남녀가 벌이는 사랑. 혁명과 사랑은 공통점이 있다. "가끔 혁명은 사랑을 닮았다고 생각해요. 결국 실패해야 아름답다는 점에서" 그래서 사랑은 매 순간 선언되어야 하고, 력명은 영구 혁명이 필요한 것인가.

"우리들의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허무한 신념도 이제는 안녕. 그냥 사람 좋아 보이는 인자한 할머니 할아버지로 늙어가기로 해요. 어느 날 우연히 한 번 더 운 좋게 어디에선가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꼭 고백할 거예요.
당신을 오래도록 사랑했다고." (본문 341쪽)

이 소설집에는 '블도그 편지', '한 남자와 두 번 이혼한 여자',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사랑에 관한 짧은 노래', '스틸 라이프' 등 단편 다섯 편이 더 실려 있다.

책 속으로

살아 있다는 건 아무리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매일의 일상보다 힘이 없다는 걸 깨닫는 일이다. 그 일상 속에서도 과거는 힘이 없다. 하지만 과거 없는 미래는 없다.
-바오밥 나무를 좋아하세요?

오늘 일을 미룰 수 있는 내일이 있다는 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바오밥 나무를 좋아하세요?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혼자 있는 시간들이 외롭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누군가는 외로워서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외로워서 아무하고나 닥치는 대로 섹스를 하고, 누군가는 외로워서 폭식을 하고, 누군가는 외로워서 이것저것 물건을 사죠. 모든 중독의 뿌리는 외로움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
혼자서도 둘이서도 영원히 해결 불가능한 우리들의 난제 고독, 그 고독을 관리하는 능력에 따라 사람은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는 걸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죠.
-스틸 라이프

황주리 지음 | 노란잠수함 | 448쪽 | 1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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