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본 강하늘과 영화 '재심' 속 강하늘은 분명히 달랐다. 뜨거운 가슴을 간직한 윤동주를 그려냈던 청년은 이제 아픔과 절망에 똘똘 뭉쳐 세상에게 버림받은 방황자로 거듭났다. 오래 묵은 상처를 들춰보면 그 안에는 거칠고 유약한 내면이 공존했다.
'재심'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강하늘 역시 스스로를 평범하게 살아가는 청년이자 배우라고 말한다. 연기를 만나 그의 삶은 변화했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언행은 언제나 남들보다 조금 더 신중하고, 조금 더 배려깊다. 더위 속에서 고역을 치르던 김태윤 감독에게 에어컨을 사준 미담을 이야기하자 난감하게 손사래를 치는 모습만 봐도 그렇다.
자신의 미담을 미담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깊이 있게 사유하는 자세. 그것이 지금의 강하늘을 만들어 온 단단한 기반일 것이다.
몇 번의 주연을 거쳤음에도 작은 일까지 진정성 있게 임하는 배우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강하늘의 진심은 어쩌면 우리에게 조금 더 특별한지도 모른다. 다음은 강하늘과의 일문일답.
- 조금 더 고민하면 조금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역할 변화를 위해 작품을 선택한 적은 없었다. 이런 작품이 내게 왔으니 이런 역할도 하는 거다. 시나리오 자체가 너무 탄탄했다. 그냥 본대로만 표현했다.
▶ 원래부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알고 있었나? 얼마 되지 않은 실화를 영화화하고, 또 거기 주인공이 된다는 게 부담이었을 것 같은데.
- 나 역시도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사건을 접했다. 개인적으로 시청자들에게 궁금증을 주는 그 프로그램을 좋아하고, 함께 방송을 보고 분노했던 수많은 시청자 중에 하나였다. 아무래도 궁금증이 생기면 사건을 검색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관심을 갖게 되고 깊게 들어가게 되더라.
▶ 그랬다면 아무래도 시나리오를 봤을 때는 더 각별한 관심이 있었겠다.
- 솔직히 시나리오를 읽기 전부터 제 속에는 긍정적인 마음이 있었다. 이 작품은 나와 만나야 될 것 같고, 재밌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더라.
▶ 현우는 살인죄 누명을 쓰고, 10년 간 교도소에 있다가 나온 캐릭터다. 처음 세상 모든 것을 불신하던 그가, 변호사 준영에게 마음을 열기까지 상당히 깊이 있는 연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 사실 외형적인 부분을 바꾸거나 표현하는 건 큰 어려움이 없다. 그냥 착하기만 한 아이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포맷은 이미 너무 많이 나와 있었다. 저런 아이라면 누명을 썼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도록 외적인 부분에 변화를 줬다. 장발에 브릿지 염색도 하고, 문신도 추가해서 겉멋이 든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가장 크게 고민이 됐던 것은 이 캐릭터가 왜 이런 행동을 할까. 그런 당위성이나 가져야 하는 심리상태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 영화 속에서 실제 피해자 분의 실명을 캐릭터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 독특하다. 피해자 최 군을 만나서 캐릭터에 대한 조언을 받기도 했는지?
- 그 분과 내 체형은 많이 다르다. 풍채가 좋으신 편인데 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살을 빼서 날이 서있는 느낌을 부각시키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한 번 만나 뵌 적이 있는데 그냥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솔직히 그 분이 살아온 세월을 내가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 게 주제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 분이 갖고 있는 깊은 상처가 있을텐데 무의식적으로 건드리게 될 수도 있어서 최대한 조심했었다.
- 우리가 9~10살 정도 차이가 나는데 내가 정우 형에게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잘해서 형이 편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그냥 형이 내게 잘 대해주는 거다. 형이 먼저 내게 다가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먼저 꺼내주고, 저를 신경써준다. 그냥 전 형에게 고마울 뿐이다.
▶ 배우 김혜숙과는 어머니와 아들로 호흡을 맞췄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또 원망스러운 그 감정의 간극을 어떻게 오갔는지 궁금하다.
- 연기를 하다 보면 왜 그 분이 '선생님'인지 깨닫게 된다. 선생님은 전체를 아우르는 느낌이 있다. 현장에서도 위트있고, 스태프들을 편하게 해주신다. 연기를 할 때도 상대방까지 감싸안는 호흡을 느끼고 있으면 사실 선생님과의 호흡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냥 내가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 어쩌다보니 실화 작품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전작인 영화 '동주'도 실화였다. 본인이 그런 현실적인 이야기를 선호하는 편인가?
- 실화 작품을 세 번째인가 하고 있다. 실화는 어떤 종류의 함정을 같이 가지고 있다. 실화는 실화로 두되, 내가 표현해야 하는 건 시나리오 안에 있는 부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이 극화되어 있는데 그걸 배우인 내가 믿어야 의미가 있는 거다.
▶ 이전에도 다양한 필모그래피로 대중을 만났지만 '동주' 이후로 강하늘이라는 배우를 향한 믿음이 더 굳어진 것 같다.
- 김혜숙 선생님을 '동주' VIP 시사회에서 처음 뵈었던 때가 생각이 난다. 저보고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보셨다. 대답을 드리니 내가 정말 너무 (영화를) 잘 봐서 물어봤다고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해주시더라. 당시에는 웃으면서 넘겼는데 '동주'는 그 윤동주라는 역사적 인물을 표현해야 하는 점이 정말 쉽지 않았다. 연기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 중 하나다.
▶ 이렇게 인터뷰를 하다 보면 생각이 깊고, 바르다는 느낌이 든다. '강하늘'하면 여전히 '착한 청년'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 같다.
-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그냥 나랑 만나는 사람은 다 같이 웃고 즐겁게, 편하게 있었으면 좋겠다. 예의를 지키는 선 안에서 그 정도만 하면서 사는 거다. 물론 그런 이미지로 봐주시는 건 감사하다. 그런데 내 얼굴을 보면서는 착한 이미지만 갖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냥 평범한 것 같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