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재계 서열 1위 삼성의 총수인 이재용 부회장, 단 한 번도 법망에 걸려들지 않았던 '원조 법꾸라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이름 석자만 들어도 위풍당당한 굴지의 권세가들의 손목에 '특검표' 수갑을 채웠다.
하지만 세상 모든 권력의 방패를 뚫어낼 것만 같았던 특검의 기세가 한 사람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다.
일찌감치 박 대통령을 사실상 이번 국정농단 사태의 '몸통'으로 지목하고도 특검은 90일 내내 청와대측과 줄다리기를 하고도 대통령과 마주 앉지도 못했다.
법을 수호해야할 특검이 법을 탓해야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특검은 박 대통령 조사의 공을 또다시 검찰로 되돌려 줄 수밖에 없게 됐다.
◇ 특검 비교 대상 檢, 朴 수사 미적대면 '역풍' 맞는다
특검은 28일 박 대통령에 대한 '조건부 기소중지' 처분을 내린다. 전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수사 기간 연장 불허로 이날이 수사기간 마지막 날이 됐기 때문이다.
조건부 기소중지는 박 대통령의 '불기소 특권'이 소멸될 때까지 시한부로 기소를 유보하는 조치다. '조건부'는 대통령 특권에 따라 수사를 멈춘다는 의미이고 '기소중지'는 범죄 혐의는 소명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검은 처분서에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혐의(직권남용), 최순실씨와 공모해 삼성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뇌물수수) 등을 적시해 박 대통령을 정식 입건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박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으로 파면되거나 임기를 마치고 민간인 신분이 되면 수사가 재개되고 기소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특검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검찰이 곧바로 수사에 착수하는 건 불가능하다. 불소추 특권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해 "검찰 수사를 믿을 수 없다"며 조사를 거부했던 박 대통령이 수사에 응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더불어 기소중지 처분은 사건을 임시로 종결한다는 의미로 기소중지 사유가 풀리기 전까지는 추가 수사를 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이 대통령 신분을 유지하는 한 검찰이 대면조사나 보강수사를 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이에 따라 검찰 수사 역시 헌재의 탄핵 인용 여부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먼저 헌재가 3월 중순 탄핵 인용을 결정하면 박 대통령에 대한 강제 수사가 가능해진다. 다만 박 대통령이 민간인이 되더라도 검찰은 강제조사에 적잖은 부담을 느낄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가 후폭풍에 휘말렸던 쓰린 기억이 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들끓은 비난 여론에 부딪힌 검찰은 임채진 검찰총장과 이인규 대검 중수부장이 사표를 내고 물러나야 했다.
검찰 입장에서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조사에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트라우마'다.
탄핵 인용에 따른 조기 대선도 검찰의 수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대통령 선거가 한창인 상황에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거침없이 진행하기에는 검찰로서는 정치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수사를 강행하면 보수층의 반발을 살 것이 분명하고, 수사가 지지부진 하면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은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의 눈치를 안볼 수도 없는 처지다.
하지만 법조계에선 검찰이 박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유야무야' 넘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특검이 이재용 부회장이나 김기춘 실장까지 구속하면서 수사상에서는 성역이 없다는 인식을 준 상황에서 비교 대상이 될 것"이라며 "지난 총선 이후에 국회 상황이 바뀌었고, 또 여권에서는 대선주자도 마땅히 없는 상황에서 뭔가 성과를 내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어 "이런 상황에서도 미적미적 댄다면 검찰 조직의 신뢰는 더 바닥으로 떨어 질 것"이며 "계속해서 특검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우병우 수사에 검찰 명운 달렸다…"
박 대통령과 함께 특검의 칼날이 비껴간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다. 특검은 우 전 수석에 대한 수사기록 일체를 검찰로 넘길 예정이다.
특검팀 대변인 이규철 특검보는 전날 브리핑에서 "개인 비리 등 모두 종합해 전체적으로 수사 완료한 다음 처리하는 게 타당하지 않겠냐는 의견"이라고 밝혔다.
특검이 우 전 수석을 기소하지 않고 검찰로 이첩하기로 결정한 이유다.
특검은 관련 법상 수사 대상인지가 불분명하거나 시간 부족 등을 이유로 우 전 수석 관련 의혹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이 상태로 우 전 수석을 재판에 넘기면 이들 의혹은 그대로 묻힐 가능성이 크다는 게 특검 판단이다. 검찰이 이미 재판에 넘어간 우 전 수석 관련 수사를 재개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본 것이다.
법조계에선 검찰이 우 전 수석에 대한 재수사를 미적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 조직 내 포진해 있다는 우 전 수석 '라인'이 영향력을 발휘하기에는 주변 여건이 우호적이지 않다는 분석이다.
법조계 또다른 관계자는 "특검이 상당한 분량의 수사 자료를 축적한 것으로 보이고 우 전 수석에 대한 비판 여론도 커 수사를 소홀히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검찰도 탄핵 국면으로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정치 상황에서 자칫 철저한 개혁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국민적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성의 표시는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검찰이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우 전 수석에 대한 보강 수사 후 구속영장을 재청구하는 강수를 둘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검찰 내부 한 관계자는 "우 전 수석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검찰 스스로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며 "영장을 청구해서 기각이 되든 안 되든 법원으로 공을 넘기더라도 뭔가 결과를 내긴 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