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던 촛불집회는 4일 전국 60여 곳에서 다시 열렸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심판일정이 진행되고 한파도 식을 줄 몰랐으나 이날 주최 측 추산 42만5천여 명이 자리를 지켰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이날 오후 5시부터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주최로 본집회가 열렸다. 참가자 상당수는 오후 2시 서초동 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사전집회와 삼성 본관 앞 행진까지 참석한 뒤 합류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에 이어 전날 특검의 청와대 압수수색까지 불발되자 권력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전방위로 번진 것이다.
인천 계양구에서 온 주부 엄미혜(52·여) 씨는 "이재용 부회장의 영장이 기각된 걸 보며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우리 법이 있는 사람만을 위한 게 아니었나 생각했다"면서 "많이 실망스러웠다"고 말했다.
퇴진행동 법률팀장 권영국 변호사는 "청와대는 이제 군사상 비밀을 이용하는 장소도 아니며 그저 범죄의 소굴일 뿐"이라며 "우리 국민들이 응징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29일 열렸던 1차 집회 때만 해도 성토의 목소리는 박 대통령과 최순실 정도였다. 당시 참가자들이 들고 있던 피켓에는 '박근혜 하야-최순실 구속', '순실의 시대' 등이 쓰여 있었다. 행진도 청와대 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전선이 확대된 건 지난 해 12월 9일 국회에서 박 대통령 탄핵안이 표결에 부쳐졌을 때다. 여권을 중심으로 탄핵안 처리에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자 시민 2만여 명(주최 측 추산)은 촛불을 들고 여의도로 향했다.
이후 황교안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절차에 들어가자 구호는 다양해졌고 행진경로는 청와대, 헌재, 총리공관 등으로 나뉘었다.
특히 특검 수사와 함께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의혹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관련 이슈는 정경유착, 의료계 비위 등 전방위로 확대됐다. 그간 곪아온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촛불민심은 각계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나섰다.
퇴진행동 박진 공동대변인은 이에 대해 "국민들은 이 과정을 통해 박근혜 개인이 아니라 박근혜 체제가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너무 많은 영역에 최순실의 입김, 김기춘의 공작이 있었고 재벌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퇴진행동 측은 헌재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인용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럴 경우 '축하 잔치' 이후 추가적인 공동대응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다만 헌재에서 예상치 못하게 탄핵안이 기각된다면 집회는 더 거세지고 격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퇴진행동 안진걸 공동대변인은 "기각은 상상해본 적도 없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훨씬 더 많은 시민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했다. 박진 대변인은 "예상치 못한 분노에 직면해 체제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면서 "2~300만 명은 모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집회 주최 측뿐 아니라 일반 참가자들도 이처럼 전망하고 있다. 2차부터 14차까지 모두 13차례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김태윤(38) 씨는 탄핵 기각에 대해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다"며 "저를 포함해 여기 있는 사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다. 걷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