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재 전자랜드 통역 "선수가 된 것 같은 희열 느껴요"

[코트의 숨은 조연] ④ 통역

변영재 전자랜드 통역. (사진=KBL 제공)
농구 코트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오롯이 코트 위를 누비는 선수들, 그리고 경기를 지휘하는 감독의 몫이다. 하지만 주연으로만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 조연들도 필요하다. 선수단이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니저를 비롯해 선수들의 몸을 관리해주는 트레이너, 상대를 면밀하게 파악해주는 전력분석원, 그리고 외국인 선수의 손발 역할을 하는 통역까지. 농구 코트의 숨은 조연들에게도 잠시나마 스포트라이트를 비춰보려 한다.[편집자주]

"마치 선수가 된 것처럼 희열을 느낍니다."


농구를 좋아하는 한 회사원이 있었다. 주말이면 TV를 통해 농구를 보면서 통역이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그냥 부러웠다. 그러다 농구단 통역을 구한다는 공고가 떴고, 회사를 조퇴하고 면접을 봤다. 워낙 농구를 좋아했던 덕분에 합격했고,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농구단 통역이라는 새로운 일에 뛰어들었다.

바로 전자랜드 변영재(38) 통역이 그 주인공이다.

변영재 통역은 "평상시 통역을 보면서 동경을 했다. '저 사람들을 얼마나 행복할까. 나도 영어는 잘 하는데'라면서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면서 "마침 동생이 직장을 알아볼 나이였다. 그러다 동생이 LG 농구단에서 통역을 급히 채용한다고 연락이 왔다. 통역이 아니라 보조 통역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면접이라도 보자는 생각에 조퇴를 하고 갔다"고 말했다.

사실 면접을 보러 가면서도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면접을 기다리다가 당시 LG 소속이었던 조상현 오리온 코치를 보자마자 마음을 굳혔다.

변영재 통역은 "당시 방이동 체육관에서 실전 투입을 해보자고 나머지 3명과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조상현 형이 나왔는데 후광이 보였다. '아! 나는 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시작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통역 일이 쉽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일이었지만, 때마침 아이도 태어나면서 가족들이 힘들어했다. 잠시 통역을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했지만, 곧 다시 농구 코트로 돌아왔다. 농구가 좋았기 때문이다.

변영재 통역은 "숙소 생활도 했고, 차도 없는 상황에서 집에서 멀기도 했다. 당시 아이가 돌이었는데 와내가 힘들어했다. 그래서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했다"면서 "시즌이 다가오면서 농구 기사도 많이 나오니까 그리움이 생겼다. 때마치 LG에서 사무국 직원을 뽑는다고 연락이 왔다. 아내와 상의하려다 전자랜드에서 통역이 급히 필요하다고 했다. 집도 가까워서 다시 돌아왔다"고 웃었다.

어느덧 8시즌째 외국인 선수들 옆에서 호흡하고 있다.

전자랜드 주장을 맡았던 리카르도 포웰을 비롯해 많은 외국인 선수를 겪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누구일까. 다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다름 아닌 지난 시즌 전자랜드에서 뛴 자멜 콘리였다.

변영재 통역은 "예전에는 올루미데 오예데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기억에 남는 선수라고 하면 콘리"라면서 "지금은 무릎 때문에 은퇴를 했다. 안타까움 때문에 기억이 날 수 있겠지만, 불편한 무릎으로 최선을 다해줬다. 팀 도착 후 MRI를 찍었는데 운동할 수 없는 무릎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인대가 없어 버틸 수 없는데 나머지 근육으로 농구를 했다. 정말 농구를 좋아하는구나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LG-KCC-SK 등에서 뛰었던 크리스 알렉산더는 반대 케이스다.

변영재 통역은 "말썽꾸러기라고 해야 하나 너무 아이 같았다. 자기 기분에 따라 움직였다. 당시 매치업이 나이젤 딕슨이었는데 몸이 부딪히는 게 무섭다고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는 것이 힘들었다. 훈련 때도 마찬가지"라면서 "그러다 왼손 슛을 연습해보자고 제안했다. 계속 연습을 하다가 한 번 턴 어라운드 왼손 훅슛을 넣었다. 너무 좋아서 방방 뛰더니 나를 보면서 왼손을 흔들었다. 힘들게 한 만큼 성취감도 있었다. 싫으면서도 애정이 갔던 선수"라고 설명했다.

변영재 통역에게 농구단 일은 천직이었다. 직접 경기를 뛰지 않지만, 코트 위에서는 선수 못지 않은 희열을 느꼈다. 가장 행복한 시간도 바로 경기를 하는 두 시간이다.

변영재 통역은 "어려서부터 농구를 좋아했다. 부모님 반대로 못했다"면서 "처음 시작해서는 내가 선수가 된 것처럼 희열을 느꼈다. 이겼을 때 승부욕이라고 하나 선수들 못지 않게 느낄 수 있어서 경기 시간 만큼은 매 경기 기쁘다"고 강조했다.

번영재 통역이 스테판 커리에게 썼던 편지. (사진=변영재 통역 SNS)
◇에필로그 - 커리를 만나러 간 이야기

변영재 통역은 SNS를 통해 스포츠 잉글리시라는 코너를 운영했다. 영어를 더 쉽게 배울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밤을 새며 SNS를 하다가 스테판 커리(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만나기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커리를 응원하는 손 모양을 해시태그(#stephcurry_korea)와 함께 SNS에 올렸다. 등번호 30과 하트를 만든 손 모양이었다. 팬들도 이에 동참했고, 골든스테이트 구단에서도 연락이 왔다.

변영재 통역은 "그 당시 커리 페이스북에 한국인들이 한글로, 또는 영어로 파이팅을 썼다. 실제로 안 쓰는 표현"이라면서 "영어가 팬, 선수의 의사소통 수단이 된다. 그렇게 접근하면 팬들도 영어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커리를 진짜 만나볼까 생각을 했다. 아는 에이전트, 선수들에게도 연락하고, 구단에도 이메일을 보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변영재 통역은 커리와 일대일로 만나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는다.

변영재 통역은 "골든스테이트 사무국에서 초대권을 줬다. 처음에는 커리를 개인적으로 만나게 해준다는 약속도 있었다"면서 "그런데 일정을 2주 미뤘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인터뷰 요청도 들어왔고, 더 크게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일정을 미뤘는데 실수였다. 최다승 기록에 플레이오프도 다가와 주변에서 사인 정도만 허락해줬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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