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외교안보 전문매체인 포린폴리시는 최근 "트럼프 당선인이 대통령 당선직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약속했던 1대1 면담을 철회했다"고 보도했다. 특히 이 매체는 반 총장을 미국의 핵심 우방인 한국의 차기 대통령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언급한 뒤 반총장을 무시(snub)했다고 표현했다. 또 트럼프 행정부가 이전의 정부와 달리 유엔에 덜 신경쓸 것이라는 유엔 외교관들의 우려도 전했다.
반 총장은 11월 8일 열린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된 지 사흘 뒤인 지난달 11일 트럼프와 20여분간 전화통화를 하면서 단독면담 일정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고, 지난주 한국특파원들과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유엔 제반 문제 협의차 자신이 먼저 회동을 제안했고, 트럼프 당선인도 "좋은 생각"이라며 화답한 사실을 공개한 바 있다.
그런데도 만남이 불발된 이유는 확실치 않다. 유엔과의 감정적 문제인지, 반 총장과의 개인적 문제인지, 당선인 신분으로서 활동을 자제하겠다는 것인지 분명한 언급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만 트럼프 정권인수위측은 "트럼프 당선인이 내년 1월 20일 취임때까지 세계 어느 지도자들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유엔측에 통보했다고 한다.
트럼프측의 해명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트럼프 당선인이 이미 지난달 17일 아베 일본 총리와 뉴욕에서 면담한 바 있기 때문이다.
또다른 분석은 대선 과정에서 나온 반기문 총장의 발언과 관련된 것이다.
반 총장은 트럼프가 당선되기 전인 지난 5월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우리는 시리아를 비롯한 각지에서 자행되는 전쟁범죄에 몸서리치고 인종차별과 증오, 특히 정치인들과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데 대해 분노한다"고 지적했다.
또 파리기후협정의 의미를 언급하면서 "이것을 살리는 데 힘을 합쳐달라. 기후변화 문제를 부인하는 정치인에게는 표를 주지 말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반총장이 언급한 인종차별과 증오 발언을 하는 정치인,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정치인이 트럼프라는 관측과 함께 트럼프의 신경을 크게 거슬렀다는 분석도 나온다.
반기문 총장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23만 달러를 받았다는 국내 언론의 보도에 대해 반 총장측이 "완전히 근거없는 허위"라고 강력 부인했지만 스캔들을 시사하는 이런 보도도 트럼프와의 회동이 불발된 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반기문 총장의 임기는 이제 만 4일 남았다. 반기문-트럼프 연말 단독면담이 불발될 가능성이 농후해지면서 국제무대에서 대권행보를 화려하게 시작하려는 반 총장의 구상에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초강대국 미국의 차기 대통령과 국내 외교채널이 전무하다시피한 현실 속에서 반 총장이 트럼프와 단독면담을 성사시킨다면 국제적 관심을 끄는 것은 물론, 외교 안보 측면의 능력을 국내 유권자들에게 가감없이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반기문 총장은 최근 특파원단 기자간담회에서 '정치적 소명'을 언급하며 대권 출마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 바 있다. 미국을 찾은 충청권 의원들과의 만남에서는 '대통령 당선 뒤 개헌' 의사를 밝히며 세규합에 나서는 등 사실상 대권행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트럼프가 마치 유엔을 미국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것처럼 발언하거나 대선과정에서 인종차별적 표현을 한 것은 매우 오만하고 부적절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행보에 갈길이 바빠진 반기문 총장 입장에서 볼 때 면담조차 허락하지 않은 트럼프는 분명 '도움이 안되는 사람'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