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共의 느낌을 지우고자 한나라당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특히 지난 대선을 앞두고는 새누리당으로 이름까지 고치면서 달려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조롱의 아이콘이 되었다.
1997년 이회창의 신한국당과 조순의 민주당이 합쳐져 '한나라당'이 태어났다. 전 국무총리와 전 서울시장이 힘을 합친다고 하자 우리당의 인지도는 급상승 했다. 대선 주자는 이회창 후보로 정해졌고 15대 대통령선거에 돌입했다.
졸지에 야당이 됐지만 의석수는 많았던 탓에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끊임없이 물고 늘어질 수 있었다. 햇볕정책은 결국 '북한에 퍼주기'란 주장이 먹히는 듯 했다.
이도 잠시, 지난 대선 때의 '세풍'과 '총풍'이 드러나면서 위기의 순간을 맞기도 했다. 하지만 1998년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씨가 입당해 대구 재보궐 선거에 이기고 여의도로 들어왔다.
2000년에 있었던 16대 국회의원 총선에서는 제1당을 유지했다. 이어진 2002년 16대 대선. 우리는 이회창 후보를 또다시 후보로 내세웠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대선은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라고 평했다.
그때 노무현 후보가 등장했다. 아무리 '노풍'이 불어도 이회창 후보를 꺾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이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무소속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에서 패하면서 '노풍'은 정점을 향했다.
16대 대통령 선거는 노무현의 승리로 끝났다. 5년의 기다림과 다시 낙선. 이회창 후보는 정계를 은퇴하고 한나라당을 떠났다.
아뿔싸, 16대 대선 당시 '차떼기 사건'이 터졌다. 불법대선자금 모금 의혹으로 코너에 몰렸다.
그런데 죽으란 법은 없었다. 새천년민주당이 대통령이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탄핵안을 제출하려고 했고 우리는 합세해서 탄핵 가결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야말로 역대급 '역풍'을 맞았다.
반면 탄핵을 이끈 새천년민주당은 9석, 우리 당은 121석. 우린 선거 전보다 무려 18석을 잃었다. 그나마 '천막당사'를 만들어 '차떼기 당'의 이미지를 불식시키려했던 당시 박근혜 대표의 노력 때문이었다.
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08년, 전직 서울시장 출신 이명박 후보가 급부상하면서 견고했던 박근혜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몸이었지만 이명박 사람, 박근혜 사람으로 갈라졌다. 이른바 친이-친박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내홍은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이명박 후보를 17대 대통령에 당선시켰고, 18대 총선도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그때 일이 터졌다. 한미 FTA로 촉발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맞물린 광우병 파동.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격히 떨어졌다. 나의 지지율도 덩달아 떨어졌다.
그때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워준 사람은 박근혜 의원이었다. 2012년 2월,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당의 상징색깔도 파란색을 버리고 빨간색을 선택했다.
모두가 나의 참패를 예상했지만 19대 총선에서 우리는 전국을 붉게 물들이며 승리했다. 이 기세를 몰아 박근혜 비대위원장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아버지에 이어 딸까지 대통령이 되는 역사를 만든 것이다.
300여명의 아까운 목숨을 잃은 대참사에 '컨트롤 타워 부재' 등 여론의 질타가 쏟아졌지만, 대통령은 눈물을 보이며 위기를 모면했다.
업친데 덮친격으로 마침내 최순실의 그림자가 실체를 드러냈다.
국가와 결혼하겠다는 대통령 옆에 늘 함께 있었던 비선 실세 최순실. 대통령의 연설문을 손보고 청와대를 아무 제지없이 들락날락 거렸다. 소위 막장 드라마보다 더한 일들이 청와대에서 벌어졌음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최순실이 대통령 못지않은 힘을 여기저기에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당은 탄핵 카드를 꺼냈다. 10여년 전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던졌던 탄핵 카드가 부메랑이 돼서 돌아온 느낌이었다.
우리당의 일부, 그러니까 비박계는 탄핵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제는 갈라설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