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 김남희, 28 편의 시와 풍경

신간 '길 위에서 쓴 시'

여행가 김남희는 <길 위에서 읽는 시>에서 자신의 마음을 뒤흔든 스물여덟 편의 시와 그 시를 읽었던 공간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는다.이 책은 오래전 큰 산을 오르기 위해 길을 나선 한 남자를 위해 만든 한 권의 노트에서 시작되었다. 그 노트는 편지가 닿지 않을 먼 곳으로 떠날 그를 위해 한쪽에는 시를, 다른 한쪽에는 편지를 써서 만든 것이다.

이 책에서 김남희는 메리 올리버의 「상상할 수 있니?」나 김선태의 「바오밥 나무를 위하여」를 통해 아직 인간의 손에 파괴되지 않은 자연의 견결함을 찬양한다. 김소연의 「눈물이라는 뼈」나 김선우의 「이런 이유」, 고정희의 「객지」를 읽으며 차가운 세상이지만 아직 우리가 타인에게 위로받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또한 어머니의 자작시인 「어머니」나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 이문재의 「우리 살던 옛집 지붕」으로 오랜 세월 눈물과 웃음과 한숨을 나눴던 가족과의 추억을 더듬어보기도 한다. 이 외에도 팔레스타인의 분리장벽 문제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는 젊은 부부에 대한 동경, 옛사랑의 추억 등을 제각각의 결을 지닌 스물여덟 편의 시와 함께 풀어간다.


혼자 여행을 하고, 혼자 살아가는 나는 늘 혼자인 시간이 넘쳐났다. 그 늘어지는 시간을 채우는 가장 쉬운 방법이 내게는 무언가를 읽는 일이었다. 소설을 읽고, 시를 읽고, 잡문을 읽었다. 시와 소설이 곁에 있는 한, 혼자여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시를 쓸 수 있다면 완벽하겠지만, 이번 생에서는 언감생심. 그러니 시인의 시선을 빌리는 수밖에. 잘 벼린 감수성과 발칙한 상상력으로 세계와 사물을 엉뚱하게 바라보는 시를 읽으며 굳어가는 내 심장을 정기적으로 흔드는 것.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에 질문을 던지게 만들고, 외면하고 싶었던 세계의 존재를 드러내는 시를 읽으며 끝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게 삶임을 확인한다. 시는 나에게 혼자 살아가는 법과 연대하는 마음을 동시에 가르쳐주었다. 여행이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이들을 만나 들리지 않던 소리를 듣게 해주는 것처럼 시도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 그것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래서 시와 여행은 닮아 있다. _본문에서(8~9쪽)

세계 곳곳을 누볐던 김남희는 이 책에서 익숙하게 여겨왔던 가족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다. 삶의 수호자로 늘 든든하게 자리를 지켰던 아버지가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아 빠르게 생명의 불이 꺼져가자 그제야 처음으로 그의 삶에 호기심을 품는다. 정년퇴직 후에도 아파트 경비로, 구멍가게 주인으로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일할 수 있음을 자랑스러워했던,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에 서툰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던 아버지. 이제 겨우 아버지라는 세계의 입구에 섰는데 그는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 그렇게 예정된 이별을 앞두고 뒤늦게 아버지의 삶을 헤아려본다.
작별인사를 제대로 나눌 새도 없이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김남희는 더 늦기 전에 엄마와 단둘이 발리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엄마와는 한 번도 함께한 적은 없었기에 모든 것이 새로웠던 둘만의 시간.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하고 희생하다가 말년에야 공부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엄마. 그런 엄마와 같은 길을 걸으며 때로는 말없이 교감하며 그녀 또한 욕망을 지닌 한 인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잘 안다고 믿었기에 호기심을 품지 않았던 부모라는 세계. 높은 산을 오르고, 깊은 바다를 건너고, 긴 사막을 가로질러 그 경험을 모두 더한대도 아이를 낳고 키운 경험 하나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며 아마 손에 넣지 못할 그 세계를 헤아려보면서, 제 속을 태워가며 자식을 키우고 그와 더불어 성장하는, 자식이라는 존재의 우주가 된 부모라는 세계를 누빈다.

나는 나 아닌 다른 이를 위해 내 삶을 희생해본 기억이 없다. 나의 중심은 늘 나로 향할 뿐, 그 자리에 누구도 들어서지 못했다. 나로만 가득찬 세상에서 외로운 나 그리고 가족을 중심에 놓아 그 대가로 자신이 사라져버린 세계에서 외로웠을 아버지. 우리 둘 중에 더 고독한 이는 누구일까. 아버지의 눈에는 이 나이 되도록 혼자 떠도는 내가 더 쓸쓸해 보였을까.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러한 것처럼, 아버지의 삶에 대한 나의 이해도 너무 늦게 찾아왔다. 자식도, 남편도 없이 죽음을 맞이할 나는 마지막 순간에 생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낼까. 이 세상과 작별하는 그 순간에 내 손을 잡고 내가 이룬 것을 속삭여줄 이가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삶이라는 긴 여행의 마지막 날까지 부디 기억하기를. 살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삶이었다는 것을. _본문에서(56쪽)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잡혀 살기보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고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길을 나선 지난 10년. 김남희는 그렇게 세상을 떠도는 길 위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었노라고 고백한다. 어떤 가면도 쓰지 않아도 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의 내면을 더 깊이 들어다볼 수 있었고, 세상의 어둡고 아픈 모습과 대면할 수 있었노라고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있는 힘껏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습을바라보며 김남희는 섬광처럼 짧다 해도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문명을 손에 넣기 위해 무자비하게 지구를 파괴하고 자연의 소중함을 잊은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김남희는 누군가가 위로해주지 못하는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사막과 숲, 산과 들판 같은 자연의 힘을 들려준다.

김남희 지음 | 문학동네 | 260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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