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수사 결과 전경련 53개 회원사들은 최순실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경제수석 등의 요구에 따라 전경련을 통해 미르 재단과 케이스포츠 재단 설립 출연금으로 모두 774억원을 출연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삼성과 현대차, SK, LG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총망라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모금도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미르재단의 경우 단 1주일만에 출연기업과 기업별 출연 분담금이 결정되고 모금액이 300억원에서 500억원으로 갑자기 증액되기도 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이와는 별개로 삼성전자는 최순실 모녀가 독일에 세운 스포츠컨설팅회사인 코레스포츠(현 비덱스포츠)에 35억원을 송금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돈은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의 말 구입자금 등으로 사용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롯데그룹은 최순실씨가 추진하는 하남복합체육시설 건립비용으로 케이스포츠 재단에 70억원을 보냈다가 돌려받았다.
삼성 등 9개 그룹 대기업 회장들은 자금 출연이나 송금을 하기 전후에 박근혜 대통령과 단독으로 면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수사발표에서는 일단 대기업은 피해자라는 측면이 부각됐다.
검찰은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기업들은 요구에 불응할 경우 각종 인허가상 어려움과 세무조사의 위험성 등 기업활동 전반에 걸쳐 직 간접적으로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출연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금 출연이나 송금이 정부와의 일정한 거래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삼성은 35억 송금이 이뤄지기 전에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중요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었으나 국민연금이 삼성의 손을 들어주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35억원이 정부 지원의 대가가 아닌가하는 의혹이 일고 있다.
롯데그룹의 경우 총수 일가가 내사를 받는 치명적이 약점에 노출돼 있을 때 자금 지원 요청이 이뤄졌고 결국 신동빈 회장의 불구속기소로 수사가 마무리됐다.
단순히 대기업이 선량한 피해자로서 정부에 의해 돈을 뜯긴 것만이 아니라 정경유착에 의한 검은 거래라고 볼 수 있는 면까지 속속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우리 대기업들은 글로벌 기준과 원칙을 내세우며 세계 초일류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하고 있다.
이런 대기업들이 ‘VIP의 관심사’라는 말 한마디에 거액을 출연하고 구시대의 유물인 정경유착 의혹까지 사는 것은 국제적으로 조롱을 살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1차적으로 비난을 받을 대상은 “최순실씨 등과 공모해” 대기업들을 상대로 강압적으로 출연을 강요하고 나선 대통령과 청와대일 것이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대기업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최순실씨가 막강한 청와대와 연결돼 있고 그 뒤에 대통령이 있는데 그 쪽에서 출연요구가 왔다. 대기업이 이를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나. 이것을 거절했을 때 후폭풍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청와대의 요구에 돈을 상납한 대기업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외압에 쉽게 무너지는 취약한 통제구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돈을 주면서 대가로 받는 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 내부의 통제시스템이 제대로 돼 있고 이사회가 기능을 제대로 하면 이런 외압은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다. 안건을 이사회에 올리고 이사회에서 안된다고 해서 출연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압에 대한 훌륭한 방어막이 될 수 있다. 그런 것도 없는 취약한 구조니까 정부가 달라면 줄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재계는 ‘정부에 뺏겼다,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 말은 믿을 수 없다. 다 주고 받는 것이 있으니까 돈을 건넸을 것이다. 돈을 건넨 대기업으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김교수는 덧붙였다.
이번 기회에 지배구조문제에 대한 대기업의 인식이 개선될 필요성도 제기된다.
신진영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이슈가 나온다든지,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 주주권 행사지침) 문제가 나올 때마다 기업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최근 정치적 상황에서 볼 때 이사회 기능이 경영진이나 지배주주에 대한 견제와 균형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대한 확실한 방어수단이 될 수 있다. 이번 기회에 대기업들의 이에 대한 인식이 바뀔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