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생태학자 '서문'은 감정이 메말라버린 듯한 중년의 일상이 초조하다. 내일에 대한 기대와 살아야겠다는 의지조차 불분명한 매일 속에 자신이 찍어놓은 발자국조차 도둑 발자국으로 오인하고 만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인생이 지르는 단말마의 비명 소리를 듣게 된 서문에게 희미해진 기억 속의 인물 '황보나영'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더듬으며 서문은 청춘의 강가에 찍어놓은 발자국 흔적을 찾아 나선다. 사라진 줄 알았던 연애 감정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잉걸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한다.
1980년대에 대학 시절을 보낸 이라면 그 시절의 연애를 떠올리며 '땀과 눈물의 시간'을 함께 복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월의 광주'로 집약되는 질곡의 세월 속에서도 어김없이 사랑은 피어났다. 여학생이 남자 선배를 부를 때 '형'이라는 호칭이 더 자연스러웠던 시절, 황보나영은 화자인 서문을 '오빠'라 부르는 속 깊은 여학생이다. 일찍이 노동 현장에 뛰어든 김종혁과 등단한 시인 남궁민은 노상 다투면서도 술집 '풍뎅이'에서 문학과 예술을 논한다.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때묻지 않은 고민을 하며,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던'(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때였다. 첫사랑인 연상의 여인 원소미와 함께 간 미미 다방은 담배인지 대마초인지 분간할 수 없는 연기로 자욱하다. 턴테이블에 돌아가는 이정선의 '섬소년'과 김정미의 '봄'은 사랑의 열정을 부채질한다. 타자기로 백지에 자모를 하나씩 찍어내듯 서툰 모양새로 사랑을 아로새기던 시절, 그래서 더 오래 잊히지 않는 그때의 연애 감정을 서문은 초로의 나이에 하나씩 되짚어 간다.
작가는 연애 감정을 청춘의 바다에 떠 있는 아름다운 섬에 비유한다. 서문이 출가한 첫사랑을 찾아간 곳도, 후배인 황보나영과 사랑의 꽃을 피운 곳도, 한순간에 타오른 열정으로 아내를 만난 곳도 모두 '어청도'라는 섬이다. 육지의 끝, 바다의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섬은 고립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사방으로 열려 있는 기억의 공간을 상징한다. 섬은 언제나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육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마치 결코 잊지 못하면서도 선뜻 마주하기는 어려운 연애의 기억처럼 말이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솜씨 좋게 넘나들며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엉키는 세계를 마술적으로 그려낸다. 이를 통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삶의 본질적인 요소는 오직 사랑이라고 역설한다.
중년의 시기에 돌아보는 사랑은 실보다 실밥이 많다. 뜯긴 자리마다 슬픔이고, 시간이 지나도 고통이 덜어지지 않는 상처 자국이다. 한 통의 전화를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애의 기억들은 거울처럼 우리의 옛 사랑의 기억을 비춘다. 소설의 말미에 나영은 미당 서정주의 시를 인용해 서문에게 묻는다.
붉은 꽃으로 가슴을 문지르면 붉은 피가 돌아오고,
푸른 꽃으로 가슴을 문지르면 푸른 숨이 돌아오는 그런 세상을
이제 우리는 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의 끝에 있는 것은 결국, 우리가 인생의 어느 시기에 서 있건 간에, ‘지금부터는 사랑을 위한 여생'이라는 다짐일 것이다. 작가는 '연애 감정'을 통해 스스로의 발자국을 되짚어간 사람들만이 진정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책 속으로
청춘은 새를 닮았다. 모래사장에 난 새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쫓아가도 결국에는 새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새의 발자국이 지상에서 끊어지는 이유는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날개가 있어 지상에서 계속 이어지지 않는 발자국.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할 뿐 새의 발자국은 계속 하늘로 이어진다. 바로 저기 저 하늘이다. 하늘이 아름다운 이유는 별이 빛나서가 아니라, 새가 있어서였다.
58쪽
고라니라는 글자를 만지니 고라니의 눈빛이 떠오르고, 눈이라는 글자를 만지니 차다. 산이라는 글자를 만지니 높고, 물이라는 글자를 만지니 낮다. 물고기라는 글자를 만지니 퍼덕거리고, 가시라는 글자를 만지니 따끔하다. 암자라는 글자를 만지니 조용하고 적막하다. 그런 모든 감각들이 문자에서 그녀의 몸으로 변화된다. 결국 사랑은 몸을 만지는 것이다.
316쪽
원재훈 지음 | 박하 | 404쪽 |13,000원
'피프티 피플'에 담긴 우리를 닮은 얼굴, 우리를 닮은 목소리에는 많은 사람들의 개인적 고민과 사회적 갈등이 녹아들어 있다. 작가는 그 안에서 허황한 낙관도, 참담한 절망도 하지 않는 건강한 균형감각으로 하루하루 겪어내는 삶의 슬픔과 감동을 조화롭게 버무린다. '피프티 피플'에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가족의 사연(한규익), 성소수자의 시선(김성진 지연지), 층간소음 문제(김시철), 낙태와 피임에 대한 인식(이수경), 씽크홀 추락사고(최애선, 배윤나), 대형 화물차 사고 위험(장유라, 오정빈) 등 2016년의 한국 사회를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빗길에 미끄러진 25톤 화물차가 중앙선을 넘어와"(장유라, 47면)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뜻하지 않은 불행을 겪지만 화물연대의 집회를 보고 자신이 먹으려던 샌드위치를 건네게 되는 아내의 마음에서 먹먹한 여운이 남는다.
'피프티 피플'은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만큼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매일매일 죽는 사람들을 모두 한사람이 옮긴다는 사실 역시 관계자가 아니면 모를 것이다. 그것이 계범의 직업이다. 전용 이동침대와 고인을 덮을 부직포 덮개를 챙겨 호출이 온 층으로 올라간다. 타이밍이 적절해야 한다. 너무 빨리 가면 유족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시간을 방해하는 게 되고, 너무 늦게 가도 유족들의 충격이 심해지기 때문에 몇분의 차이지만 사려 깊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 노력을 병원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 같긴 하다. 계범은 그 일을 오래 했다.(하계범, 339면)
정세랑 지음 | 창비 |396쪽 |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