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Ⅲ'은 역사, 철학, 과학과 기술, 문학과 연극, 시각예술, 음악까지 중세의 다양한 사건, 사상, 제도, 문화, 예술, 심지어 시시콜콜한 중세의 일상까지 다룬다.
특히 '중세 Ⅲ'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아비뇽 유수, 몽골 제국, 마르코 폴로, 스콜라 철학, 토마스 아퀴나스, 연금술, 화약과 나침반,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조토, 고딕 성당과 우리가 알고 있는 굵직한 키워드가 여럿이라 더욱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지금까지의 중세가 긴 어둠을 지나 조금씩 발전을 경험했다면 1200-1400년의 중세는 찬란한 황금기와 함께 수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여기에 칭기즈 칸, 무라드 1세와 같은 동방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중세와의 거리를 좁혀 준다. 게다가 한국인 학자가 쓴 '위해한 항해가들과 동방의 발견;은 중세에 관심이 많은 대한민국 독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13-14세기는 단테가 활동했던 시기다. '신곡'은 근대가 아니라 중세의 산물로 그가 문학가지이자 철학가로서 당대 사회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험이 담겨 있다. 수많은 비유와 암시로 가득한 이 저술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다. 단테가 동시를 살았던 왕과 군주들에게 건넨 충고, 그리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펼친 불멸의 이야기들은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나'라는 개인과 함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답한다. 단테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노래한 인문주의자로, 그가 아니었다면 르네상스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책 속으로
단테 알리기에리는 중세 문화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다. 그의 작품은 당대 문화의 집성이며 전체로는 시대를 대변한다. 젊은 시절에 운문과 산문을 혼합해 쓴 『새로운 인생』은 청신체의 심오한 의미를 충족시켰고, 여러 이론이 적용된 서정시에서도 이와 같은 특징이 반복되었다. 『속어론』에서는 수사학적-시적 연구를 보여 주었다. 전투적인 시인이었던 단테는 20여 년 동안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기도 했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정치적인 성격의 『제정론』을 쓰기도 했다. 『신곡』에서도 드러나듯 단테는 사후 세계로의 여행을 이야기하며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양식의 시에서 받은 영향을 포괄했고, 백과사전적인 성격의 시를 수단으로 하여 모든 현실을 대변했다.
-‘문학과 연극: 단테 알리기에리’에서
기계 장치를 이용하여 시간의 흐름을 측정한다는 발상은 인간이 (기본 구도에서 출발한 물레방아의 진화를 통해 확인된) 기계적 사고방식의 발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대에 기원한다. 기계 기술은 이제 다른 차원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처럼 여겨졌다. 새로운 발명을 향한 추진력은 상당했다. 1338년에 베네치아에서 동방을 향해 출항한 범선에는 기계 시계도 실려 있었는데, 이는 서방의 기술적 우위를 다시금 확인하는 증거였다. 14세기에 기계 시계는 성당, 교회, 도시의 탑에 설치되었다.
-‘과학과 기술: 기계 시계’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서명, 비문, 자료 등에 작품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 남겨졌다. 니콜라 피사노와 조반니 피사노, 그리고 캄비오의 아르놀포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유명한 인물(치마부에, 부오닌세냐의 두초, 시모네 마르티니, 조토, 피에트로 로렌체티와 암브로조 로렌체티)부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제자들까지, 익명의 관습은 빠르게 사라져 갔다. 조반니 피사노는 1301년에 스스로를 ‘헛된 것을 시작하지 않는 자, 훌륭한 지식으로 행복한 니콜라의 아들’이라는 축원과 더불어 피스토이아 두오모의 (제단 관련) 양피지 문서에 서명했다.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개념과 고려가 급진적으로 변화되었음을 말해 주는 거대한 변화의 첫 단계였다.
-‘시각예술: 중세의 예술가들’에서
움베르토 에코 기획 | 김정하 옮김 | 차용구, 박승찬 감수 | 시공사 | 1100쪽 | 8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