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파상의 시대, 해답은 있는가

신간 '사회학적 파상력'

사회학자 김홍중의 '사회학적 파상력'을 펴냈다. 낯설은 단어 파상력은 무슨 뜻일까? 파상破像이란 기왕의 가치와 열망의 체계들이 충격적으로 와해되는 체험을 가리킨다. 파상의 시대는 꿈과 깨어남 사이에 여러 형태의 '가위눌림'이 전개되고 , 과거의 꿈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꿈 사이에 긴 '환멸'이 전개되는 시기이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자들이 여전히 꿈결에 취해 있고, 성급한 자들은 미래를 어설픈 상상으로 봉합하고자 한다. 꿈과 꿈 사이에 펼쳐진 이 가위눌림과 환멸을 있는 그대로 겪어내는 힘, 그리고 희망의 근거를 그 파편들 속에서 찾아내려는 자세, 그것이 바로 파상력의 핵심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과거의 꿈들이 부서져가면서 형성된 마음의 폐허에 집중하면서, 한 사회가 꿈을 통해 어떻게 공통의 미래를 생산하는지, 그리고 동시에 그렇게 구성된 미래의 꿈들이 고통스럽게 붕괴하면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희망이 움터나오는지를 섬세하게 점검하고 있다.

사회가, 사회의 마음이 꿈꿔온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리는 파상의 시대. 사람들은 기왕의 가치와 열망의 체계들이 충격적으로 와해되는 체험 앞에 속수무책으로 맞닥뜨린다. 9·11 테러, 2008년 금융위기, 3·11 동일본 대진재, 이슬람 국가(IS)들의 등장 등, 파국적으로 엄습해오는 재난과 위협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어지러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파상의 시대는 문명사적으로 대변동의 시기이며, 대안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의 꿈들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며 문제화되는 시기다.


제1부인 '몽상과 각성'에 실린 글들은 집합적 몽상이 허물어지면서 드러난 리얼리티의 참혹한 민낯에 대한 예민한 증언과 관찰들이다. 여기서 나가사키 원폭 투하, 3·11 동일본 대진재, 세월호 이야기를 다룬다.

김홍중은 세월호 사건을 목도한 국민들의 마음이 부서졌다고 말한다. 이 마음의 부서짐은 일반적인 우울이나 무기력과 같은 병증으로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주권적 우울'이다. 참사 후 우리는 모두 마음이 부서졌고, 그 결과 말이 부서졌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집단 무기력의 상태에 빠졌다. 저자는 이를 '통감痛感의 해석학'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제2부는 '생존과 탈존'이라는 제목 아래 ‘서바이벌’이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세계의 비참을 다룬다. '저항' '반항' '자유' '도전'의 상징이었던 이전 세대의 청년들과 달리 현재의 청년세대들은 '생존'을 하나의 '주의'로 삼아버렸다. 이들이 추구하는 '생존'은 목숨의 구제가 아니라 경쟁상황에서 잔존하여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에 가깝다.

생존주의란 당혹스런 개념이다. 왜냐하면, 생존은 그 본성상 주의主義와 결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존은 주의 이전, 성찰 이전, 사고 이전의, 생명의 충동과 힘의 영역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존재로서 생존에의 경향성을 벗어던질 수 있는 존재는 없으며,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존재들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생존에의 열망은 자연적인 것이며, 선악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문제는 생존이, 조직된 주의가 될 때, 지향된 가치가 될 때, 집합적 마음의 짜임의 원리가 될 때이다. 생존이 주의로서 나타날 때, 그것은 무언가의 붕괴를 지시하고 있다.(291쪽)

생존生存과 더불어 부의 제목을 이루고 있는 탈존脫存은 생존의 반대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가거나 생존을 향한 마음의 동원이 불가능해져서 그 에너지가 자기파괴 또는 현실도피의 방향으로 흐르는 삶의 형식을 가리킨다. 이 우울한 마음의 풍경은 청년문화의 한 흐름이 되었으며 생존주의라는 시대적 꿈의 파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김홍중은 이를 탈존주의脫存主義라 부른다. 이어 생존과 탈존의 이분법으로 동시대 청년문화를 단순화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소박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함께 모여 시를 쓰는 아마추어 문학동인에 대한 현장연구를 시도하며 다양한 삶의 형식들에 대한 탐구를 예고한다.

제3부는 이와 같은 연구들의 바탕을 이루는 문화사회학의 이론적 점검에 할애되고 있다. 김홍중은 막스 베버의 '이해사회학'을 자신이 시도하는 '마음의 사회학'의 범례로 내세우면서, 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상호침투에 주목한 여러 이론들을 통합하여 인지, 감정, 욕망/의지의 복합적 능력으로서의 '마음'에 대한 이론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런 작업들을 관통하는 지적이고 윤리적인 '스탠스'의 이름이 바로 파상력이다. 파상력은 부재하는 것을 현존시키는 능력인 상상력과 반대로 현존하는 것들의 환각성을 깨닫는 힘, 혹은 그와 연관된 체험을 가리킨다. 김홍중에 의하면 우리 시대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그려내는 힘인 상상력이 아니라, 미래의 부재나 결손 혹은 비관과 진실하게 대면하면서, 그 고통과 맞서고, 그로부터 시효가 지난 몽상들을 가차 없이 떠나보내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함께 모색하는, 고뇌의 공통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몰락,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환태평양 주요국가들의 우경화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대두…… 파상의 시대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엘리엇의 시구처럼, 세상은 "폭발이 아니라 흐느낌으로" 끝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어두운 꿈에서 깨어나려는 절박한 마음들이 존재할 때, 우리는 머리를 흔들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발버둥을 치면서 이 '가위눌림'을 벗어날 수 있다. 어쩌면 과거의 꿈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꿈 사이의 긴 '환멸'을 있는 그대로 겪어내는 힘, 그리고 그 파편들 속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파상력으로써, 우리는 책의 표지로 사용된 장민승의 작품 속 어두운 바다와 같은 세계에서 '희미하게' 부서지는 미광 너머로 날아가는 새처럼, 새로운 세계를 다시 만들어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미래를 약속하는 힘이지만, 파상력은 어떤 미래도 약속하지 못한다. 예언하지도, 계몽하지도, 도덕적 훈계를 가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혹은 그것 속에서 우리는, 파괴되어가는 것들과 새로이 생성되는 것들을 사회적 가시권과 가청권으로 끌어내어, 고뇌의 공통공간을 만들 수 있다. 파상력은, 사회적인 것이 끓어오르며 새로운 길을 뚫는 장소, 그 어딘가에서 예기치 않은 희망의 씨앗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성되는 곳을 증언하기를 소망한다. 이런 점에서, 파상의 체험 속에서 수행된 이 연구들은 현장증언의 성격을 띤다. _'프롤로그'에서

김홍중 지음 | 문학동네 | 576쪽 | 2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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