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행 : 김효영 기자 (경남CBS 보도국장)
■ 대담 : 허진수 회장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 허진수 :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김효영 : 부마민주항쟁 벌써 37주년입니다. 다시 한 번 부마민주항쟁의 의의를 말씀해 주신다면요?
◆ 허진수 :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에 부산, 마산에서 일어났던 민주항쟁입니다. 이 항쟁은 1980년대를 관통했던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전국적으로 벌어젼 1987년 6월항쟁으로 마무리된 항쟁 역사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김효영 : 네.
◆ 허진수 : 이 6월 항쟁이 시민혁명이 완성된 것이다. 부마민주항쟁은 시민혁명의 시원이었다. 이렇게 부마민주항쟁은 80년대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을 향도했던 사건이라는데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 김효영 : 그렇군요. 당시 부산, 마산에서 이런 항쟁이 시작된 이유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 허진수 : 당시 유신정권은 실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마디로 악질적인 독재정권이었습니다. 우리 반만년 역사에 그렇게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독재를 횡행했던 농단했던 그런 정권은 없었습니다.
실제 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나 10대인 연산이 아주 폭군이었고 모든 권력이 집중된 왕이었다면 오히려 그것보다 더 권력, 정보력과 모든 것을 독점한 사람이 박정희 정권이었고 이 정권에 대해서 반대했던 것이 부마항쟁이었던 것이죠.
◇ 김효영 : 그런건 전국적인 상황인데, 부산과 마산에서 시작된 이유가 있습니까?
◆ 허진수 : 당시에 경제적인 상황도 아주 안좋았는데요. 실제로 경제성장이 10% 대로 고공성장을 하다 79년 부마항쟁이 일어난 해에 들어가면 경제가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제2차 오일쇼크가 왔고 부가가치세가 도입되고 하면서 소위 지금 현재 아주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양극화현상이 부마항쟁 당시에 유신정권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가 있거든요.
◇ 김효영 : 네.
◆ 허진수 : 이것이 좀 더 고통을 받았던 지역이 부산과 마산지역이었습니다. 제조업들의 중심이었고 마산은 자유수출지역이라는 독특한 지역의 수출을 중심으로 했던 기업들이 수출이 막히면서 그 당시에 24개 기업이 도산을 합니다. 10월 정도 되면. 거기서 한 5천명 이상이 노동자들이 거리로 쫓겨나게 되죠.
이러한 상황들이 학생시위와 맞물리면서 민중시위로, 그리고 부마항쟁으로 그렇게 이어진, 그래서 그 당시 상황을 본다면 부산과 마산은 대한민국의 어느 지역보다 문제가 더 심각한 지역이 아니였느냐. 그래서 여기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효영 : 그렇군요. 시위는 어떤 방식으로 시작됐습니까?
◆ 허진수 : 처음에 부산에서 10월 16일날 시작된 학생시위가 시내로 쏟아져나오면서 일반시민과 결합을 했구요. 마산 같은 경우에는 10월 18일날 경남대에서 시작된 학생시위가 오후 2시쯤 시작해서 거리로 나오기 시작해서 오후 6시쯤되면 창동, 오동동, 북마산을 중심으로 해서 이 지역에서 시민과 합세하면서 거의 시위참가 시민이 1만 명 정도 모인 대규모 시위였죠.
◇ 김효영 : 그렇군요. 시위 당시 구호는 무엇이었습니까?
◆ 허진수 : 시위 당시 구호는 실제로 '독재 타도, 유신 철폐' 이런 구호였습니다만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구호였구요.
실제로 민중들의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은 사회적 현상이 된 양극화 현상에 대해 도저히 이제는 더 이상 못살겠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로 갈아엎어보자. 한 마디로 말하면 권력과 결탁한 소수의 자본가들, 부를 가진, 독점한 사람들을 향해서 외치고 싶었던 말은 이제 너희들만 잘 먹고 잘 살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같이 잘 먹고 살아보자. 최소한의 삶이라도 살아보자라고 하는 그런 외침이 실제로 '독재 타도, 유신 철폐' 그 기저에 민중들의 마음이 깔려있었다고 봐야죠.
◇ 김효영 : 일종의 계급투쟁이었군요?
◆ 허진수 : 네. 실제로 민중민주운동의 시발점으로 '부마항쟁'을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 김효영 : 알겠습니다. 당시 희생자는 얼마나 나왔습니까?
◆ 허진수 : 네. 마산과 창원지역에서는 약 500명 정도가 연행되고 구속되고 이렇게 됐구요. 부상이라든지, 재해를 입은 이런 사람들 숫자까지 포함하면 엄청나겠죠. 정확하게 지금까지도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 김효영 : 알겠습니다. 학교 교과서에서는 부마항쟁이 다뤄지고 있었습니까?
◆ 허진수 : 그렇지 않습니다. 부마항쟁에 대해서는 일부 교과서에 유신정권을 언급하면서 비슷하게 약간 언급된 적은 있습니다만, 정식으로 언급된 적은 없습니다.
◇ 김효영 : 그럼 국정교과서를 만들어 낸다는데, 거기에서는 이 문제는 아예 다루어지지 않거나 왜곡될 수 있다. 이런 걱정도 하시겠군요?
◆ 허진수 : 그럼요. 문제는 부마항쟁을 다루냐, 다루지 않느냐하는 국정교과서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유신정권을 미화하느냐, 미화하지 않느냐 이 문제가 더 큰 쟁점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만약에 유신정권이라고 하는 그 박정희에 대해서 미화하게 되면 부마항쟁은 실제로 부정되는 것이거든요. 박정희를 긍정하게 되면 부마항쟁은 부정돼야잖습니까?
부마항쟁은 박정희 정권 또는 유신정권을 총체적으로 부정하고 항거한 사건이었는데 그 정권 자체가 훌륭한 정권이었다, 박정희가 구국의 영웅이었다 이런 식으로 미화되어 버리면 그 훌륭한 정권, 구국의 영웅에 반대한 부마항쟁은 부정될 수 밖에 없거든요. 이것은 더 큰 문제이죠.
◇ 김효영 : 그러면 자연스럽게 80년 광주나 6월 항쟁까지도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구요?
◆ 허진수 : 그럼요.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부마항쟁에 대해서 정확하게 조사되거나 역사적으로 기술된 완성된 역사서가 없거든요.
◇ 김효영 : 네.
◆ 허진수 : 그래서 이번에 그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내년부터 시작하게 될 건데요. 좀 더 광범위하고 학계나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구술사를 정리할려고 합니다. 그것이 부마항쟁의 정확한 기록으로 그렇게 인정되고 그렇게 되고 난 이후에 그것이 역사교과서에 실릴 수 있는 그런 길을 찾아야되겠죠.
그 당시에 피해자뿐만 아니라 이번에 구술사 작업을 하는 것은 그 당시에 참여했던 많은 시민들, 실제로 부산과 마산에 참여했던 시민들 숫자를 합친다면 10만 이상에 육박하지 않겠습니까?
◇ 김효영 : 네.
◆ 허진수 : 그래서 이 분들을 중심으로 많이 구술사를 받을 생각이고 기록을 할 생각이고 그 다음에 그 당시에 가해자, 그러니까 군인, 경찰 이런 분들도 찾아내서 하고 그 당시에 보도됐던, 우리 국내에서는 제대로 보도 못했지만, 지금 많이 찾아지고 있습니다만 외국에 미국이나 일본쪽에서 보도됐던 신문자료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습니다.
◇ 김효영 : 네.
◆ 허진수 : 이런 것을 토대로 제대로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 김효영 : 알겠습니다. 앞으로 하실 일이 많으시겠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고요. 말씀 감사합니다.
◆ 허진수 : 네.
◇ 김효영 : 지금까지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허진수 회장 만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