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사람 쌔고쌨다"…부당 근로조건 항변했다간 즉각 해고
노인 구직자 넘치는데 변변한 일자리 없어…업체 횡포 '감내'
온종일 근무지인 학교를 지키면서도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하거나 숨져도 산업재해를 인정받지 못하는 학교경비원들의 열악한 처우가 도마 위에 올랐다.
휴일에 24시간을 꼬박 학교를 지키지만, 근무시간은 고작 6시간만 인정해주는 '노예계약' 탓에 평일 매일 밤을, 휴일에는 온종일 학교에 묶여 있으면서도 한 달에 손에 쥐는 급여는 채 100만원도 안 된다.
열악한 근로조건에다 당직을 서고도 근무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부당계약'인데도 경비원들이 학교를 떠나지도, 변변하게 항변조차 못 한다. 그나마 겨우 얻은 일자리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 구직자는 넘쳐나는데 변변한 일자리가 없다 보니 고용 업체의 횡포를 감내하는 수밖에 없다.
'65세 이상 노인 고용률 OECD 2위'라고 말하는 우리나라 노인 일자리의 부끄러운 민낯이고, 자화상이다.
일자리가 없다 보니 노인 구직자들은 저임금에 장시간 근로를 강요하는 질 나쁜 일터에도 목을 매야 하는 처지다.
이런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용역업체들이 터무니없이 부당한 근로계약서를 내놓으며 배짱을 부리는데도 경비원들이 쉽사리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전국 학교의 야간과 휴일을 지키는 경비원들은 상당수가 50대 이상 중장년층이다. 60~70대 노인도 많다. 은퇴한 이후 생계를 위해, 자녀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취업하는 경우가 많다.
고령사회고용진흥원이 고용노동부에 위탁을 받아 2014년 제출한 '감시·단속적 근로자의 최저임금 적용에 따른 보안대책 연구'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전국의 경비직 근로자 15만1천741명 중 47.9%인 7만2천717명이 60∼70대로 나타났다. 50대 근로자까지 폭을 넓히면 무려 63.9%까지 높아졌다.
노인들이 경비 업종에 몰리는 이유는 별다른 기술이 필요 없고, 오랜 시간 근무지에 얽매여 있기는 하지만 큰 힘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다.
경비업계 관계자는 "학교 경비원을 선발한다고 지역 정보지에 공고를 내면 불과 하루 만에 10명 이상의 이력서가 쏟아져 들어올 정도로 경쟁률이 치열하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자리의 질이 낮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노동시장에서 노인들을 필요로하는 일자리 대부분은 경비원이나 환경미화원과 같이 장시간 근무와 저임금에 시달리는 직종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노인 고용률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제대로 된 노후생활을 준비하지 못한 채 퇴직한 노인들은 연금제도의 수혜 비율이 낮은 데다가 과거에 은퇴 후 경제적 버팀목이 됐던 자녀들의 지원마저 줄어들면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면 생계유지가 곤란할 수 있어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우리나라 65세 이상 고용률은 31.3%로, 34개 회원국 중 아이슬란드(36.2%)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무려 OECD 평균(13.4%)의 2.3배에 달했다. 나이가 들어도 쉽게 은퇴하지 못하는 피곤한 우리 노년층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해야 겨우 생계가 유지되는데 기존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는 전무하다시피 한 게 현실이다.
결국, 노인들은 경비원이나 미화원, 단순 근로직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지은정 부연구위원이 최근 발표한 '60살 이상 고령자 적합 일자리 연구'에서 분석한 고용 형태별 노인 직종을 보면 60세 이상 근로자 중 단순 노무 종사자 비율이 31.8%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농림어업 숙련 종사자 21.7%, 장치·기계조작·조립종사자 10.8%, 판매종사자 10.3%, 서비스종사자 8.6%, 기능원 및 관련 기능종사자 7%, 전문가 및 관련 종사자 5.3%, 사무종사자 3.2%, 관리자 1.2% 순이었다.
지 위원은 "노인 고용률은 높지만 대부분 단순 노무직이나 농업에 종사하는 것이 문제"라며 "연령대가 높을수록 일하는 시간은 많은데도 이에 상응하는 임금을 받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리는 한정돼있지만, 일자리를 구하려는 고령층 구직자들이 많다 보니 치열한 일자리 쟁탈전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힘들게 일자리를 얻은 학교경비원들은 불합리한 조건에서도 제대로 항의조차 못 하고 침묵하기 일쑤다.
이른바 '쪼개기 계약'으로 열악한 근무 여건에 시달리는 충북의 70대 학교경비원 A씨의 사례에서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A씨는 휴일을 예로 들면 24시간 학교를 지키지만, 근무시간 중간마다 휴게시간을 1∼2시간씩 끼워 넣는 방식의 변칙적 근로계약 때문에 실제 근무시간으로 인정받는 건 6시간에 불과하다.
A씨는 "괜히 잘못 이야기했다가 회사 눈 밖에 나면 그대로 쫓겨나가는 게 현실"이라며 "그나마 있는 일자리라도 지키려면 불합리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충북본부 공공운수노조 배석진 조직차장은 "고령인 경비원이나 환경미화원들은 낮은 시급에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한 채 열악한 근로조건에서 일한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해결책의 핵심은 결국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있다고 강조했다. 노인 일자리의 질을 개선하는 데 힘쓰면서 열악한 근로조건을 가진 작업장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규제가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한국노동연구원 김복순 전문위원은 "좋은 일자리를 얼마나 만드느냐가 노인 복지 실현의 출발점"이라며 "사업장 중 비정상적인 업무 환경을 가진 곳에 대한 지속적인 정부 관리·감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