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와 독립운동가 사이, 그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신념을 자유롭게 오간다. 아직까지도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황옥 경부를 모티브로 한 인물답다.
군계일학처럼 빛나거나, 표현 방식이 강렬하지는 않다. 오히려 많은 백조들 사이에 놓인 오리 새끼처럼 이질적이다. 송강호는 1920년대 혼란의 시대상에 최대한 밀착한 연기로 이정출이 독립운동가로 거듭나기까지의 현실적인 과정을 그려낸다.
그에게 '밀정'은 간만에 즐겁고도 어려운 도전이었다. 어찌보면 너무 나약한 이정출이라는 인물을 굵직한 역사의 흐름 속에 담아내는 작업은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송강호는 이정출의 이야기를 지치지 않고 쌓아 나갔다.
과연 송강호에게 이정출이란, 그리고 '밀정'이란 무엇이었을까. 다음은 송강호와의 일문일답.
▶ 일본 경찰인 이정출이라는 인물은 어떻게 해석했나?
- 복잡 다단한 사람이 아닌가. 시대가 낳은 인물 같다. 어떤 한 가지의 신념이나 모습으로 살아가기에는 복잡한, 격변의 시대이지 않았나 싶다. 이정출의 흔들림은 첫 장면부터 나온다. 그것이 켜켜이 쌓여 가는 거다. 그러다 의열단 우두머리 정채산이라는 거대한 인물도 만나서 회유도 당한다.
▶ 처음에는 전형적인 친일파로 시작했다가, 또 다시 독립운동에 힘을 보탠다. 좀 더 명확한 개연성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 사실 계기나 사건을 만들려고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만약 그러면 그 시대와 이정출이라는 인물이 가진 기나긴 아픈 역사의 세월이 피상적이고 얇아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다루는 세계 자체가 좀 더 크고, 사람에 대한 깊이감을 보여주려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 난이도 높은 연기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 연기하기에는 까다로웠다. 확실함을 표현하기 위한 강력한 방법을 생각해봤다. 이정출이라는 인물의 미묘한 심리와 흔들리는 동공, 이런 것들. 그런 점에서 어려웠고, 또 매력적이었다. 매력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기는 거니까.
- 이병헌 씨와는 워낙 친하다. 8년 만에 같은 영화에서 만나서 재밌었다. 훌륭한 연기와 함께 짧지만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하더라. 사실 더 유머러스하게 만들 수도 있었는데 이 영화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만남을 연출하지 않았나 싶다.
▶ 영화 속 또 다른 일본 경찰 하시모토 역 엄태구와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경성으로 향하는 기차까지 젊은 하시모토와 노련한 이정출의 대립이 밀도 높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 어떻게 하다 보니 친일이 친일을 처단하는 처참한 상황에 이르렀다. 하시모토라는 존재는 상당히 중요한 작용을 한다. 위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가 되기를 바란다. 그 속에서 그들은 취할 것만 취하면 되니까. 그로 인해 이정출에게는 하시모토보다 더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적이라는 단순한 명제보다는 혼란스럽고 아픈, 인간적인 고통이 있는 것이다.
▶ 이번 연기에 대한 호평이 상당하다. 연기에 있어서는 이미 베테랑이기 때문에 어떤 성장을 보여줄 수 있을까 궁금했다. 아무래도 어려운 도전이었던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는지?
-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영화를 하게 된다. 15년 전 박찬욱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캐스팅에서는 세 번 정도 거절을 했다. 네 번째에서 하기로 결정을 했는데 그게 거절한 이유랑 똑같다. 싫은 마음 때문에 하게 되는 역설적인 부분이다. 어려움이 매력으로 다가오는 거다. 어떤 배우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하나 하나 헤쳐 나가는 거지.
- 연계순의 시신을 마주하던 순간이다. 그 작은 여자의 손목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것 같다. 사실 시나리오에는 없던 장면이다. 무심히 쳐다보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정출이라는 인물의 감정이 그렇게 쌓여 가서 오열하게 된 거다.
▶ 서대문 형무소는 아무래도 역사적인 장소라 감회가 남달랐겠다.
- 서대문 형무소를 처음 가봤다. 하필이면 지난해 가장 추운 겨울날이었다.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였는데 그래도 우리는 난로가 있었다. 이보다 수십배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신념을 가지고 조국을 위해 희생한 독립투사분들을 생각했다.
▶ 이정출의 실제 모티브가 된 황옥 경부는 역사적 평가가 다소 엇갈리기도 하는 인물이다.
- 역사적 판단이 유보된 인물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정출이라는 인물처럼 그 시대가 낳은 사생아 같은 느낌 아닐까. 이정출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밀정이 될 수밖에 없고, 생존을 위해서 어떻게든 현실적인 모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어마어마한 소용돌이를 간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