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은 다른 경제단체와의 차이점으로 “순수 민간 경제단체”임을 내세운다. 전경련은 5.16 군사 쿠데타 때 만들어진 한국경제인협회의 후신으로 태생적으로 정경유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얘기가 있지만, 현 시점에서 다른 경제단체와 차별적인 특성으로 강조하는 정체성이 바로 “순수 민간 경제단체”라는 점이다.
그러나 전경련은 최근 “순수 민간 경제단체”를 벗어나는 일로 연일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전경련의 산하단체인 자유경제원이 지난해 경제 정책과 무관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의 선봉장 역할을 하더니, 올해에는 보수 우익 단체 어버이연합에 5억 원이 넘는 돈을 편법 지원한 의혹에 휩싸였다.
전경련의 어버이연합 지원 논란이 다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에는 다시 미르재단과 K스포츠 재단 설립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봉착해 있다. 각종 의혹의 중심에 서 있는 인사 중 한명이 바로 전경련 이승철 상근 부회장이다.
대기업들을 상대로 한 전경련의 모금으로 800억 원에 가까운 돈이 일시에 모아졌고, 재단 설립 신청 하루 만에 정부의 인가가 나는가 하면, 정치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지목되고 있는 최순실씨의 지인들이 재단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표적으로 K스포츠 재단 정동춘 이사장은 최순실씨가 다니는 강남의 한 스포츠 마사지 센터의 원장으로 알려졌다. 언론과 정치권에서 청와대의 개입 의혹을 제기하는 이유이다.
이런 의혹에 대해 전경련 이승철 부회장은 청와대의 개입을 부인한다. 기업들의 의견을 모아 자신이 아이디어를 내어 재단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어떤 기업들이 재단 설립 의견을 냈는지를 묻는 질문에 이 부회장은 단순히 “여러 기업”이라며 구체적인 답변을 피한다.
이 부회장은 물론 두 재단의 이름을 바꾸고, 박 대통령 사저 및 최순실씨의 빌딩 인근에 위치한 재단을 여의도로 이전하며, 문제가 된 인사들의 교체를 검토하는 등 재단 정상화 방안을 마련해 조만간 발표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전경련의 수습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의 개입 의혹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전경련의 뒤늦은 대응조차도 청와대와의 사전 교감 속에 이뤄지고 있는 이른바 “의혹 의 꼬리 자르기” 차원이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전경련이 이처럼 순수 민간경제단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각종 논란과 의혹에 휩싸이자 정치권에서는 ‘전경련 해체론’까지 대두하고 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어버이 연합에 돈을 대주고, 대통령의 노후 자금을 대주는 전경련은 더 이상 경제단체라고 부를 수 없다. 정경유착의 온상이고 비리 부패 주범인 전경련은 이제 해체할 때가 됐다”고 주장했고, 국민의 당 장진영 대변인은 “정권 실세를 호가호위하며 불경기에 허덕이는 기업들의 팔을 비틀어 돈을 뜯어내는 것이 자유시장경제 창달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정치권의 전경련 해체론은 사실 ‘정치적 공세’로 치부하며 의미를 깎아내릴 수도 있다. 무시하기 어려운 것은 재계 일각에서 일고 있는 전경련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다.
전경련은 경제인들의 순수 민간경제단체인 만큼 회원사인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법인세 인하 문제와 기업 유보금 비판, 경제민주화 의제 등 각종 현안에 대해 대기업의 입장을 집요하게 설파하는 것도 전경련으로서는 결코 이상하지 않다. 전경련이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해서 시비를 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관건은 전경련이 각종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대기업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대기업의 한 고위 임원은 “신뢰의 위기”를 말했다. “전경련이 회원사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려면 각종 현안에 대해 국민들의 동의를 이끌어낼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데, 정권 차원의 각종 의혹에 연루되면서 전경련의 말에 설득의 힘이 실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임원은 “전경련의 역할을 어떻게 재설정할지에 대한 고민을 이미 오래 전부터 했어야 했는데, 옛날 방식과 옛날 프레임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며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똑같이 재계의 다양한 역할을 기대했지만, 이것이 현 시점에서 면피 사유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한 CEO는 “현재의 전경련 체제로는 또 하나의 재벌로 인정받는 것 말고는 가입할 유인이 크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기존 회원사만이 아니라 새롭게 성장하는 기업들 사이에서 ‘우리도 전경련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로 전경련의 위상과 역할이 제고되고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정치권에서 전경련 해체론이 나온다고 해서 순수 민간단체인 전경련을 해체시킬 정치세력은 없다.
그러나 각종 정치적 구설로 시민들과 기존 회원사들 사이에서는 신뢰를 잃고, 반면 새롭게 부상하는 기업들이 전경련 가입을 꺼린다면 그것이 조직 위축, 아니 해체의 시작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전경련 해체론의 진원지는 정치권이라기보다는 전경련이다. 전경련 회장직을 고사하는 분위기가 일상화되면서 쇄신을 이끌 신임 회장을 찾는 일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