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률의 스포츠레터]'영원한 낙천가' 하일성 "참다 죽느니 즐기다 죽으려오"

'이 푸근한 웃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니...' 하일성 전 야구 해설위원이 KBO 사무총장 시절인 2007년 CBS 라디오에 출연한 모습.(자료사진=노컷뉴스)
벌써 10년 전 일입니다. 2006년 카타르 도하아시안게임 때였습니다. 하일성 당시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은 현장 취재를 왔던 야구 기자단과 회식 자리에서 얼음잔을 들고 있었습니다.

2001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수술까지 받은 뒤로 술, 담배를 끊었던 하 총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장 자격으로 참가한 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이 대만, 일본에 연패를 당해 금메달이 무산되면서 얼음에 소주를 탄 칵테일에 속 타는 마음을 달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하 총장은 끊었다는 담배도 피워 물었습니다. 다소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제게 하 총장은 "임 기자, 술 담배 참다가 스트레스 받아서 죽느니 죽을 때 죽더라도 시원하게 해볼 것은 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라고 하더군요.

하 총장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프로야구는 물론 한국 야구계를 아우르는 살림을 맡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다시 술, 담배에 손을 댔어야 했던 상황. 자신의 생명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하 총장은 그렇게 극한 상황을 낙천적으로 넘겼습니다.

해설위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제 11대 KBO 사무총장을 맡아 처음 치렀던 국제대회. 더군다나 1998년 방콕과 2002년 부산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냈던 만큼 도하 대회에서도 기대가 컸습니다.

그러나 대표팀은 한 수 아래라던 대만과 사회인 야구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일본에도 져 동메달에 머물렀습니다. 하 총장은 당시 대회가 끝나면 철거될 경기장 관중석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관전해야 했습니다. 당시 김재박 대표팀 감독은 귀국 기자회견을 피해야 할 만큼 여론이 좋지 않았고, 하 총장은 책임을 통감해야 했습니다.

중국 베이징 우커송 야구장에서 열린 쿠바와의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을 3-2 승리로 이끌며 금메달을 거머쥔 야구대표팀 선수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감격하며 그라운드를 도는 모습.(자료사진=노컷뉴스)
그랬던 하 총장은 2년 뒤 더 큰 무대인 올림픽에서 도하의 수모를 차고 넘치게 만회했습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대표팀 단장을 맡아 김경문 감독과 함께 야구 사상 최초의 9전 전승 금메달을 합작해냈습니다.

최종 예선 때부터 한국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았던 호시노 센이치 당시 일본 대표팀 감독의 콧대를 꺾은 통쾌한 우승. 한국은 예선과 4강전에서 잇따라 일본을 격파했고, 야구 종주국 미국은 물론 아마 최강 쿠바까지 누르며 정상에 올랐습니다.


하 총장은 "김 감독과 함께 강력한 구위로 상대를 윽박지르는 김광현(SK)은 일본전에, 능구렁이처럼 상대를 잘 요리하는 류현진(LA 다저스)은 쿠바나 캐나다 등에 집중하자는 전략이 먹혔다"고 기뻐했습니다. 아시안게임 동메달 수모를 올림픽에서 무려 금메달로 설욕한 겁니다.

당시 회식자리의 분위기도 도하 때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하 총장은 "2년 전 도하 때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시원한 축배와 함께였습니다.

하 총장은 술, 담배를 조심하던 2년 전과 달리 양이 늘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 총장은 "병원에 갔더니 술, 담배를 끊었을 때보다 몸이 더 좋아졌다고 하더라"면서 "역시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시원하게 푸는 게 건강에 좋다"고 웃었습니다.

다만 살짝 걱정도 있었습니다. 하 총장은 "원래 금연 홍보대사로 위촉되면서 금연껌 광고도 찍었다"면서 "그러나 술, 담배를 다시 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몇 천만 원 손해를 본 것 같다"고 귀띔했습니다. 그래도 기분좋은 금메달이었습니다.

하 총장 시절 한국 야구의 국제대회 쾌거는 더 이어졌습니다.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이었습니다. 2006년 4강 신화를 넘어선 성적으로 한국 야구는 당당히 세계 정상을 다투는 강호로 우뚝 섰습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세계 2위에 오른 한국 야구대표팀이 25일 밤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해 팬들에게 인사하는 모습. 하일성 KBO 사무총장(위 오른쪽부터)이 유영구 KBO 총재, 김인식 감독과 함께 환영식에 참석했다.(자료사진=노컷뉴스)
베이징 금메달과 WBC 준우승은 한국 프로야구 전성기의 토대가 됐습니다. 세계에서도 통하는 한국 야구에 대한 붐이 조성되기 시작했고, 당시 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한 류현진, 봉중근(LG), 이대호(시애틀), 김현수(볼티모어), 윤석민(KIA), 정근우, 이용규(이상 한화) 등은 프로야구의 중흥기를 이끌었습니다. 적잖은 선수들이 해외 무대로 진출해 한국 야구의 위상을 더 높이는 발판도 됐습니다.

대표팀 단장을 맡았던 하 총장에 대한 평가도 높아졌습니다. 사실 베이징올림픽과 2009년 WBC 대표팀은 사령탑 선임이 난항을 겪었지만 하 총장이 나서 매듭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베이징올림픽 사령탑은 2007년 11월 열리는 최종 예선부터 대표팀을 맡아야 했습니다. 규정대로라면 2006년 한국시리즈 우승팀인 삼성 선동렬 감독이 맡아야 했지만 본인이 극구 고사하면서 사령탑 선임이 표류했습니다. 결국 김경문 당시 두산(현 NC) 감독이 지휘봉을 잡아 올림픽 금메달 감독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2009년 WBC도 마찬가집니다. 2008년 우승팀인 SK 당시 김성근 감독(현 한화)이 사령탑에 올라야 했지만 건강 상의 이유로 고사했습니다.(물론 김 감독은 KBO의 진정성이 다소 떨어지는 제의에 서운한 감정이 있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결국 하 총장이 김인식 당시 한화 감독을 찾아갔고, 준우승이라는 값진 결실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하 총장에 대한 평가가 썩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2007년 경영난에 빠진 현대 유니콘스 구단 매각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평가입니다. 당시 하 총장은 신상우 총재와 함께 인수 구단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나섰습니다.

STX, 농협, KT 등 굵직한 기업들의 이름이 거론됐지만 차례로 무산됐습니다. KBO는 섣불리 이들과 협상을 발표했다가 틀어지면서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라는 생소한 투자 기업이 낙점돼 히어로즈 구단이 창단됐으나 초반 경영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일성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이 2008년 1월 서울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열린 제8구단 창단과 관련한 긴급 이사회 결과 발표 기자회견 도중 생각에 잠긴 모습.(자료사진=노컷뉴스)
2008시즌 뒤 하 총장은 2009년 3월 KBO에서 물러났습니다. 약 4년 임기 동안 영욕의 세월을 뒤로 한 채 2010년 다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지상파는 아니었지만 케이블 채널에서 다시 본업인 해설가의 삶을 이어갔고, 다른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KBO 사무총장 시절의 공백 때문이었을까요? 하 총장에서 돌아온 하 위원의 해설은 여전히 구수했지만 격변한 시대 흐름에 다소 뒤처진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야구 몰라요" "역으로 가나요?" 등의 유행어를 낳은 하 위원이었지만 결국 2014시즌을 끝으로 마이크를 놓게 됐습니다.

야구계를 떠난 뒤 하 위원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근근이 방송에 출연하며 입담을 과시했지만 간간이 들려온 소식은 낭보는 아니었습니다. 지난해 말 빌린 돈을 갚지 않아 사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는 뉴스가 나오는가 하면 최근에는 프로 구단 입단을 전제로 돈을 빌려 역시 사기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솔직히 야구계를 떠난 하 위원과 연락도 뜸했던 게 사실입니다. KBO 사무총장과 해설위원을 할 때만 해도 이것저것 취재를 위해 통화를 했지만 지난해부터는 아예 소원해졌습니다. 자유계약선수(FA) 전망을 묻기 위해 2014년 11월 했던 통화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언제나 "임 기자, 오랜만이야" 구수하게 전화를 받던 하 위원. 총장 시절 답변이 곤란한 질문에도 친절하고 자세한 답변을 해줬던 달변가. "참다 죽느니 즐기다 죽는 게 낫다"던 영원한 낙천가, 하일성. 그의 말처럼 야구인으로 이룰 것은 다 이루지 않았을까요?

비록 그의 마지막은 안타까웠지만 그의 인생만큼은 충분히 값졌습니다. 프로야구선수협회는 이날 "고(故) 하일성 위원의 공로를 잊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2006년 수모의 도하와 2008년 영광의 베이징, 2009년 찬란했던 WBC 현장에서 함께 했던 하 위원의 영면을 기리고 또 기립니다.

'10년 전이 엊그제 같은데...' 하일성 해설위원이 2006년 KBO 사무총장으로 선임된 뒤 기자회견 중 질문에 답하는 모습.(자료사진=노컷뉴스)
p.s-하 위원의 별명 중에는 '하구라'가 있습니다. 워낙 말솜씨가 좋아 붙기도 했지만 허수도 많다는 뜻도 있을 겁니다. 하 위원의 총장 이후 해설이 다소 신뢰가 떨어지는 경우가 가끔 있어 회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 위원이 어려운 질문에 대해 "임 기자, 사실 그거는 잘 모르겠는데"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경우도 이 시기였습니다. 워낙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 야구에 대한 버거움도 느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30년 이상 해설위원의 깊은 내공은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해설위원의 해인 2014년 하 위원은 오승환(세인트루이스)이 떠난 삼성의 우승을 맞혔고, 최하위에 처져 있던 LG가 시즌 후반 롯데를 제치고 가을야구를 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야구 몰라요"라는 명언은 한국 프로야구가 있는 한 언제까지라도 유효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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