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는 정말 옥사했을까?’ 지은이는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조선어독본' 내용에 깊은 의문을 품었고, 이렇게 해서 김정호를 주인공으로 세운 장편역사소설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고산자 김정호'는 역사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한 남자의 삶과 그의 업적을 소설적으로 복원하며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조선 후기의 가감 없는 사회상을 굵고 담백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작가가 묘사한 김정호는 굳은 뜻을 세우고 오로지 앞만 보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우직한 남자다. 여지학에 뜻을 둔 소년 시절부터, 머리와 수염이 허옇게 센 장년이 되어 마침내 필생의 역작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게 되기까지 집요하게 한 우물을 파는 남자로 그려진다.
하지만 '고산자 김정호'는 김정호라는 주인공에만 시선을 집중하지 않는다. 무심한 듯 담담하게, 부유하는 카메라처럼 주변 인물들에게도 골고루 시선을 돌린다. “김정호가 속한 1800년대는 근대화의 전 시대로 매우 혼란했다. 서학(천주교)의 박해가 어느 때보다 심했으며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큰 줄기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그런 어지러운 사회상을 담아보려 애썼다.”라고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이, 동문수학한 벗이자 평생지기인 실학자 최한기, 이웃집 소금장수 배소금과 그의 딸 이화, 정호의 서울살이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모 영감네, 바람처럼 나타나 벗이 되어버린 ‘이야기보따리 장수’ 오랑이 등 ‘인정 많고 마음씨 고운’ 우리네 이웃들이 등장하여 이야기의 결을 한껏 풍성하게 만든다.
‘바람구두’가 아니라 ‘바람짚신’을 신은 남자라고 부를 만한 조선의 지리학자 김정호. 불과 150여 년 전을 살아갔던 그 남자의 흔적을 따라간 '고산자 김정호'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오롯이 허구”다. 그러나 작가가 따뜻하고 해학적인 시선으로 직조해낸, 평생을 바쳐 위대한 한 가지를 이룩한 대가의 우직한 삶과 조선 후기 민초들의 정겹고 살가운 풍경은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들 가슴에도 잔잔한 울림을 줄 것이다.
줄거리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소년 정호는 이웃집 소금장수 딸 이화와 오누이처럼 자라난다. 정호의 아버지는 ‘장교’ 노릇을 하던 이였는데 작은 민란에 연루되어 누명을 쓰고 죽는다. 천애고아가 된 정호는 고향을 떠나 개성으로 간다. 거기서 월천이라는 스승을 만나고 ‘지도’라는 것을 난생처음 본다. 조선 후기인 19세기,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한편으로 이용후생의 학문인 실학의 시대이기도 했던 당시, 정호 역시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에 지도가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지학에 뜻을 둔다. 월천의 집에서 사숙하면서 정호는 평생의 지기가 될 최한기를 만나고, 전국 팔도를 메주 밟듯 다니며 역사와 지지학 공부에 매진하면서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간다. 한편 이화는 ‘봄이 되면 오겠다’는 약속을 믿고 정호를 기다리지만 정호는 스승 월천의 유언에 따라 스승이 미리 짝을 지워준 작은년이와 혼인하고 만다. 그리고 서울에 자리를 잡는다. 녹록하지 않은 서울살이를 하면서도 정호는 틈만 나면 전국 팔도를 돌며 자료를 만들어가며 조선 팔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할 수 있는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를 꿈꾼다. 한편 관상감에서는 지도가 부정확한 것이 들통 나서 지도를 전면 개작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관상감에서 일하는 최도원은 정호의 지도를 몰래 베껴그려서 기한 안에 제출하고, 덕분에 벼슬도 높아진다. 문호 개방의 거센 바람과 더불어 점점 지도가 ‘힘’이 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정호에게 지도를 그려달라는 은밀한 제안이 오는데…….
우일문 지음 | 인문서원 | 412쪽 | 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