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서울 대치동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만난 '심용환 역사&교육연구소' 심용환(40) 소장은 "현 정권이 스스로 '성공한 역사'로 규정한 것들만 기억하려 하기 때문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지금 정권이 기억하려는 역사는 물질적인 부강함과 센 권력만을 추구하는 '성공지상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15 경축사를 통해 실패한 역사로 지목했던 헤이그 특사의 경우도 그래요. 헤이그 특사는 해외 독립운동의 기반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데도 말이죠. 이 논리라면 안중근 의사도, 임시정부도 실패한 역사가 됩니다. 일제시대에 이완용 등이 자신들의 친일을 합리화하던 논리도 성공지상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커요."
심 소장이 최근 내놓은 역사 교양서 '단박에 한국사 근대편'(펴낸곳 위즈덤하우스)은 이러한 성공지상주의적 역사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이 책은 근대사를 다룬 만큼 최근 건국절 논란 등과도 맞닿아 있어요. 그런 현실 때문에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듯합니다. 이번 책을 쓰면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100년 전과 똑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내부적으로 퇴행적 세계관을 지닌 정권의 오만함이 커다란 문제를 낳고, 외부적으로는 중국·일본 등과 얽힌 복잡한 국제 관계가 요동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죠."
그는 "지금은 분명히 100년 전과는 다른 길을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역량을 낮게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100년 전과 다른 점 하나는 현재 우리나라가 힘이 없지 않다는 거예요. 문제는 분명히 다른 길을 갈 수 있는데도 스스로 약자라고 생각한다는 데 있어요. '내면의 식민지화'라고 부를 수 있겠네요. 10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경제력은 물론 사회적 자본은 그 수준이 달라요. 그런데도 왜 일본의 도발을 이렇게까지 내버려두고 있는지…. 역사는 '응용'하라고 있는 것이지 '반복'하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번 책을 통해 이러한 화두를 던지고 싶었어요."
◇ "역사는 '응용'하라고 있는 것이지 '반복'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이 책을 처음 기획할 때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얘기하지 못했던 포인트, 그러니까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컸어요. 책 중간 중간에 일러스트가 들어가면서 대중성도 강화했죠. 부모가 자식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재밌게 들려 줄 수 있도록 돕고 싶었어요."
경어체를 썼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듯이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하나 엮어가는 덕에 접근이 쉽다. 심 소장은 "이 책을 쓸 때만큼은 저만의 문체에 대한 고민을 접었다"는 말로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려 애쓴 흔적을 드러냈다.
"전작 '역사전쟁'(생각정원·2015)이 정확한 사실과 체계적인 논리에 바탕을 둔 정교한 전투였다면, 이번 책은 군수보급창고예요. 사실과 논리는 정확히 하되, 수학으로 치면 중3 정도 난이도를 목표로 잡았거든요.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세상이 흔들리곤 하는데, 독자들이 이 책 하나만 읽어도 어지간한 흔들기는 '유치하다'고 느낄 만한 시민의식을 갖기 바라는 마음이었죠. 개인적으로는 자기복제에 매달리는 탓에 갈수록 퇴행하고 있는 역사 교양서 시장에 전환점을 만들어 보자는 의지도 컸어요."
그는 작가로서 자신이 내놓는 책들이 '불쏘시개' '디딤돌'이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번 '단박에 한국사'를 보신 독자들이 가족, 친구 단위에서 역사 이야기를 할 때 대화 수준이 향상됐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어요. 요즘 근대를 다룬 한국영화가 많이 나오잖아요. '암살 재밌더라' '밀정 재밌더라'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 책에서 이런 게 나왔지'라고 떠올릴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작가로서 제가 벌이는 일들이 역사 대중화의 새로운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 "현 정권의 역사 왜곡은 집요한 장기집권 설계도에 따른 것"
"김구 선생은 '내가 바라는 독립은 문화주의'라고 했어요. 일본의 경우처럼 민족주의의 완성을 자민족 우월주의나 제국주의로 본 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연대에 바탕을 둔 문화국가로 봤다는 데 우리의 위대함이 있는 거죠.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문화주의를 추구했다는 점은 중국, 일본을 설득할 수 있는 무기예요. 동아시아 안에서 우리의 역할을 고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대사에 대한 통찰적인 시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 이번 책이에요. 역사의 주인공은 결국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특별한 영웅을 만들고 그 시대를 한 사람의 이름으로 기억하려는 경향이 강해요. 이를 거부하고 그동안 역사에서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품고 싶었습니다."
그는 앞서 지난해 말, 전작 '역사전쟁'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역사 왜곡 논란은 내년(2016년)에 본격적으로 불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특별할 것 없는 당연한 예상이었죠. 훌륭한 정치 지도자 한 사람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시대는 이제 끝났어요.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고도화된 거죠. 이러한 흐름에 따라 개개인의 시민의식을 성장시킬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게 안 되면 건국절 논란과 같은 빈약한 논리에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란을 이슈로 소비해 버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바보 같더라도 정공법으로 끈질기게 싸우는 길 밖에는 없어요. 바보가 많아지면 시민의 자율성도 성장한다고 믿습니다. 헌법 전문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이라고 했잖아요. 이젠 우리도 150년 치욕의 역사를 넘어서서, 남북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새로운 시민의식을 만들어가야 할 때가 아닐까요."
심 소장은 현 정권이 근대사를 왜곡하려는 의도를 설명하면서 '장기집권 설계도'라는 표현을 썼다.
"1982년 일본 자민당이 역사교육 장악을 위한 '검인정 파동' 실패 뒤 보수 정재계가 집결해 내놓은 첫 안이 개헌이었잖아요. 그렇게 지금 일본은 완벽하게 우경화됐고요.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재벌 위주의 노동개혁, 미디어법 등도 일본의 경우를 염두에 둔 장기집권 설계도인 거죠. 특히 역사 교육은 당장 표가 안 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 세대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세뇌효과가 큽니다. 독재자들이 공통적으로 교육에 손을 대는 이유도 여기에 있죠. 현재 정부가 벌이고 있는 역사 논쟁은 하루이틀 사이에 급조된 것이 아닙니다.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는 계획인 거죠."
그는 "내년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으로 현대사를 다룬 책을 준비 중"이라며 "나중에 반드시 기회주의의 역사를 쓰고 싶다"고 강조했다.
"공교롭게도 1917년에 박정희(1917~1979)와 시인 윤동주(1917~1945)가 태어납니다. (따라서 내년은 '윤동주 탄생 100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8년 장준하(1918~1975)·문익환(1918~1994) 선생이 태어났어요. 한 사람은 일제시대에 방황하고 갈등하다가 생채실험으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고(윤동주), 또 한 사람은 일본군에서 탈출해 독립군이 됐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독재자에 맞서다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장준하). 그리고 일제시대 학자로 살던 또 한 사람은 해방 뒤 '빨갱이'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통일을 위해 불가능해 보이던 길을 개척해 나갔어요(문익환).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일제시대 일본군 장교에서 해방 뒤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박정희). 우린 자식들에게 보통 '출세하라'고 말하잖아요. 일제시대의 친일, 독재시대의 방관을 합리화했던 출세·성공 지상주의의 흔적이 여전히 짙게 남아 있는 거죠. 이러한 성공지상주의는 결국 기회주의로 귀결됩니다. 그래서 기회주의, 기회주의자들의 역사를 꼭 쓰고 싶어요. 이것이 구체적으로 규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성공이라는 일그러진 이름 앞에서 모든 가치를 내던지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