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헬조선 개돼지론'에 관한 두 심리학자의 명쾌한 해설 ② '이것은 옳은 일'…뒤틀린 신념이 빚은 비극 '헬조선' ③ "넌 선택권 없어"…'복종' 명령에 몰아치는 '저항' |
"밀그램의 '대리자적 상태'라는 개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 이유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그 내용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1961년 가을, 밀그램이 연구를 시작하던 해에 아돌프 아이히만도 전범으로 기소된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렌트 역시 법정에 앉아 악의 상징인 아이히만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법정에 들어서는 남자는 등이 약간 구부정하고 깐깐해 보이는 한낱 관료일 뿐이었다."
레이처는 "아렌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가장 무서운 사실은 이 남자가 괴물이 아니라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란 점'이라고. 그리고 정말 끔찍하게도 그 어떤 사람이든 옳고 그름의 상황 속에서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관료주의에 물들었을 경우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이히만이 나치의 명령을 무조건 따른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옳은 일'이라는 확신을 갖고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행동했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한 스티브 레이처의 설명을 들어보자.
"아이히만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는 수동적으로 명령을 따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가장 끔찍한 악행은 1944년에 벌어졌다. 유럽의 마지막 유대인 사회를 몰살하기 위해 헝가리로 간 것이다. 그 당시 그의 상관이었던 힘러는 패전을 예상하고 연합군과 거래를 맺으려고 했다. 유대인 포로와 군수물품을 맞바꾸려 한 것이다. 거래는 성사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이때 아이히만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힘러에게 위협적으로 대항했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거래를 막으려고 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하는 일에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 "관건은 '무엇이 순응하게 만드는가'보단 '어떤 조건에서 저항하는가'에"
레이처는 아이히만을 두고 "굉장한 신념의 소유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결코 생각 없이 저지른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수십,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게 될 거라는 점까지…. 그 행동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굉장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밀그램의 연구에서도 누군가 어떤 선택을 했다면 그 선택에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긍정적인 계기로 인해 행동한 것이다. 그들은 영혼 없는 관료보다는 의욕적인 추종자인 셈이다."
밀그램의 실험에서 복종의 정도는 버전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났다. 전기충격을 주는 사람이 명령에 100% 복종한 시험버전도 있고, 10%만 복종한 버전도 있다. 전기충격을 받는 사람이 나타내는 반응에 따라 달랐던 것이다.
예를 들어 교사 역할의 피실험자와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가 한 공간에 있을 경우, 그러니까 학생이 아파하는 반응을 바로 옆에서 봤을 때는 60%의 참가자가 실험을 거부했다.
실험실의 직원 두 명이 가짜 피실험자를 연기하면서 실험을 거부하는 버전, 그러니까 교사 1·2·3 가운데 결국에는 진짜 참가자 1명만 남게 되는 경우에는 90%가 "실험을 그만하겠다"고 했다.
'권력자와의 근접성', 즉 필요한 정보를 전달한 뒤 실험자가 자리를 비운 채 스피커폰으로 피실험자와 소통한 경우에도 참가자의 80%가 실험을 거부했다.
이러한 실험 결과에 대해 심리학자 알렉스 하슬람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밀그램 연구를 떠올릴 때면 많은 사람들이 너무 우울하다고 얘기한다. 인간이 마치 영혼도 생각도 없는 좀비나 인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점은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아니다. 인간은 분별 있게 사고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주체다. 그리고 복잡한 상황에 다양하게 반응한다. 즉 여기서 제시되는 문제는 '무엇이 인간을 순응하게 만드는가'보다는 '인간은 어떤 조건 속에서 순응하고 복종하는가' '어떤 조건 속에서 저항하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