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30년을 따라간다. 여정은 길고 지난하다. 잠시 회사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했다가도, 금방 '해고' 통지 앞에 무기력해진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회사 앞에서 노동자들은 끊어질 것 같다가도 어떻게든 버텨낸다. '투쟁한다'보다는 '버텨낸다'는 이야기가 더 맞을 것이다.
노동 운동이라고 해서 제 밥그릇을 챙기는 귀족 노조(노동조합)를 생각해서는 안된다. '노조'와 '귀족'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노동자들은 연대하지 않으면 힘을 잃어 버린다. 노동자 개인이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 특히 조직에 팽배한 부조리와 맞서기에는 힘도 목소리도 부족한 탓이다.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 권력화된 노조에 대해서는 '귀족 노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단순히 어떤 권리를 강경하게 요구한다고 해서, 모두에게 불편한 파업을 한다고 해서 그게 '귀족 노조'인 것은 아니다. 앞선 두 가지는 모두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 행사다.
요구하는 쪽도 노동자들이고, 절박한 쪽도 노동자들이다. 실상 그들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있지 않다. 30년 간 한진중공업 노동 운동과 함께 한 김진숙 지도위원이 끝내 크레인에 올라간 것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들은 쥐똥 섞인 도시락을 먹지 않기 위해,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일터를 바꾸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왔다. 회사에 무조건 순종하던 이들이 서서히 인간답게 일할 권리를 찾아 나간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들은 쥐똥 섞인 도시락을 먹는가? 여전히 사고로 죽은 동료를 두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나? 물론 아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생존권을 쟁취해 내는데는 성공했다.
20대에 들어와 어느덧 머리가 희끗해진 노동자부터 아버지를 따라 입사한 30대 노동자까지. '영도'에 바친 청춘이 무색하게도, 세대와 세대를 지나 회사의 불합리한 처우는 교묘한 방식으로 계속된다.
노동자들 각자 입장과 생각은 모두 다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동료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곱씹고 되뇌어본다. 결국 비극은 노동자들 간의 연대가 끊어지면서 시작됐다. 함께라면 무서울 것이 없었던 이도 홀로는 버텨내지 못했다.
똘똘 뭉쳤던 역사를 뒤로 하고, 현재 한진중공업은 복수 노조 체제로 바뀌었다. 노동자들의 힘이 분산된 셈이다.
김 지도위원은 차마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던 동료들을 막을 수 없었다. 처지를 잘 아니까 더욱 그랬다. 제2 노조가 주는 온갖 혜택을 거부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노조의 힘이 가장 강했을 때, 더 치열하게 변화를 이뤄내지 못한 것은 또 다른 후회 지점이다.
어쩌면 노동 운동은 가장 현실과 맞닿은 곳에 있다. 그 종착지에는 거창한 대의나 명분이 아닌, 돌이켜 보기에도 서글픈 현실적 이유들이 남았다.
한진중공업 최초의 민주 노조에 남은 조합원들은 이제 200명 남짓. 경영 위기에 빠진 조선업체들은 대형 구조조정이라는 칼날을 빼들었다. 경영이 어려워지면 인건비부터 축소하는 기업들의 관행은 현재진행형이다.
더 큰 위기 속에서 그림자들은 언제고 빛을 향해 헤엄쳐 나아간다. 눈부시도록 찬란했던 '영도'(影島)에서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