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선교사들

광복절을 맞아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 힘쓴 해외 선교사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 정신을 후대로 이어가기 위한 의미있는 행사들이 열렸다.


조선의 독립 의지, 전 세계에 알린 스코필드

“그 당시 외국인선교사들 거의 전부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를 꺼려한 것은 사실이오. 그런데 박사는 처음부터 달랐지. 나이도 불과 31살 밖에 안된 그가 어떻게 그렇게 용감하고도 침착하게 우리 편을 들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소. 다른 외국인은 흉내도 못낼 노릇이거든. 난 늘 박사가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위해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인 것같이 느껴왔소."

지난 12일 저녁. 사단법인 호랑이스코필드재단 회장인 정운찬 전 총리는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이갑성 선생이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에 대해 회고한 글을 읽어내려갔다.

1916년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세균학 교수로 왔던 스코필드 박사는 34번째 민족 대표로 불릴 정도로 독립 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던 인사였다.


스코필드 박사는 3.1 만세 운동 뿐만 아니라 잊혀질 뻔 했던 제암리 학살 등을 카메라에 담아 사진과 글로서 전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코필드기념사업회 김재현 사무총장(한국고등신학연구원 원장)은 "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의 모든 정보를 취합해서 민족 대표들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했고 탑골공원과 시청 앞에 이르는 삼일 운동 현장과 심지어 제암리의 학살 사건 현장까지 소아마비에 걸린 불편한 몸으로 직접 가서 사진을 찍어 일제의 만행을 전세계에 알렸던 분"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민족을 향한 스코필드의 사랑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이어졌다.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 1958년 다시 입국한 그는 부패 추방 운동과 함께 미래의 지도자를 길러내는 일에 힘썼다. 재능은 있지만 형편이 어려운 학생 2 백여 명이 스코필드 박사의 도움을 받았고 정운찬 전 국무총리도 그 중 한명이었다. 스코필드 박사로부터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받아 학업을 이어간 정 전 총리는 대학 전공을 선택할 때에도 스코필드 박사가 조언을 해줬다고 말했다. 사회의 빈부격차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공부할 수 있는 학과를 선택해 공부하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것.

정운찬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사단법인 호랑이스코필드재단은 스코필드가 평생 강조한 정직과 정의, 박애와 사랑 등을 가르치고 실천해 나갈 인물을 길러내기 위해 장학문화사업단을 지난 12일 출범시켰다.

1차로 사회적 약자와 새터민 등 34명을 1차 장학생으로 선발했다.

이번에 장학생으로 선발된 탈북 대안학교 '여명학교'의 임수아 학생은 자신이 특별한 기회를 얻은 것처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 함께 베풀고 나누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미국의 배신자'라는 비난 감수하며 독립운동 앞장선 헐버트 선교사

한편, 외교적 방법을 통해 조선의 독립 운동을 지원했던 헐버트 선교사 추모 예배도 광복절을 맞아 지난 12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드려졌다.

헐버트 선교사는 1896년 고종황제의 아관파천에 도움을 줬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뒤, 조선의 자주 독립을 촉구하는 고종의 친서를 갖고 당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을 찾아가려 시도하기도 했다.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은 헐버트 선교사는 독립 영웅이라며, "고종황제의 밀사로 헤이그에서, 워싱턴에서 자기 모국 ‘미국의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루즈벨트의 친일 정책을 비난했다"고 밝혔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들. 정의와 박애 등 그들의 기독교정신은 3.1만세 운동 100주년을 앞둔 우리 사회가 계승해야 할 유산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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