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면서 비롯된 광우병 파동만 해도 그것이 그렇게 오랜 시간 전 국민적인 이슈로 발전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옥시 사태나 강남역 살인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이전 같으면 불운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었을 일들이 전 사회적인 이슈로 부상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신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의 저자 허 경은 그 이유로 합리성의 기본적인 인식 틀이 바뀐 때문이라고 말한다. 도덕성과 합리성 자체가 시대와 공간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합리성이나 도덕성은 없다. 그 전에는 별일 아니던 세월호와 옥시, 강남역 등의 사태가 이젠 이슈가 된 이유는 사회적 약자와 희생자에 대한 관심으로 볼 수 있다. 담론의 중심이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통치자에서 피통치자로 이동한 것이다.
그럼 새로운 도덕성, 합리성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내가 나름의 도덕성, 합리성을 구성하듯이 각각의 사람들은 각각의 합리성을 구성한다. 너와 나 각자의 합리성, 도덕성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이는 일반화해 미리 규정할 수 없으며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아니 대화하는 과정에서만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니 보편적 진리에 대한 일방적인 확신, 혹은 독점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적이다.
칸트에 따르면 혁명이란 삶과 사고의 기본적 기준, 가치가 모두 바뀌는 것이다. 보편성과 합리성에 대한 정의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합리성의 형성 과정에 기존의 것과는 다른 ‘약간’의 균열이 생겨났다. 광우병과 세월호와 옥시와 강남역을 지나며 모든 것은 ‘조금’ 달라졌다. 그러나 이 ‘조금’, 이 ‘약간’의 변화는 작고 미약하나 우리의 인식과 실천을 지배하는 지층 자체가 겪고 있는 거대한 변화를 알려주는 증거들이다. 이들 증거로 미루어 현재 대한민국은 실로 거대한 인식론적, 정치적 변형의 시기를 관통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는 임계점을 넘어,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 이제까지 그럴 수도 있던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이제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어진 것이다. 그때는 맞았으나 지금은 틀리다! 변형과 위기의 시대, 혁명의 시대다. 그리고 이 거대한 변형의 시대, 위기야말로 우리에게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가 연대해 행동한다면, 우리의 합리성으로, 우리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경 , 대안연구공동체 (기획) 지음 / 길밖의길 / 138쪽/ 6,000원
'대안연구공동체 작은 책- 인문학 삶을 말하다' 시리즈 2차분은 앞에 소개한 허 경의 저작 이외에 다른 저자들의 저작 3권이 함께 출간되었다.
장의준 , 대안연구공동체 (기획) 지음 / 길밖의길 /128쪽/ 6,000원
김어진 , 대안연구공동체 (기획) 지음 / 길밖의길/ 112쪽/ 6,000원
이은경 , 대안연구공동체 (기획) 지음 / 길밖의길 /84쪽/ 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