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별, 그리고 시(詩)

신간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 창비시선 400 기념 선집

한송이 꽃
-도종환

이른 봄에 핀
한송이 꽃은
하나의 물음표다

당신도 이렇게
피어 있느냐고
묻는

도종환 시인은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두워지기 전에 황홀하고 아름다운 노을이 하늘 가득 펼쳐지는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시 '한송이 꽃'은 이른 봄에 핀 한송이 꽃의 존재를 통해 이 꽃을 보는 사람의 존재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먼저 기쁜 소식을 알리는 이 봄꽃처럼, 시 속의 화자도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성취의 기쁨을 누렸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절망
-김성규

꽃들은 왜 하늘을 향해 피는가
그리고 왜 지상에서 죽어가는가

김성규 시인은 이 시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시간을 함부로 소모하고, 견딘다는 것
몸이 아파 누워 있다 창문을 열어보니 봄이 온 느낌이다."

요즘 능소화가 하늘을 향해 활짝 피어 있는 걸 보면, 하늘과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한 줄 지어보았다. "꽃은 하늘하늘 하늘을 향하고 /해는 구름몰래 배시시 웃고" 이 늠름하던 능소화들도 어느 땐가 갑가지 땅바닥에 뚝 떨어져 있는 것을 본다. 왜 지상에서 죽어가는가. 이 낙화, 죽음은 생의 이면임을 강렬하게 환기한다. 우리 인생은 한 번 죽는가? 한 번 죽는다면 살아 있을 때는 저 능소화처럼 활짝 피어야하지 않겠는가. 과연 죽음이란 무엇인가? 절망이 바로 죽음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때때로 절망하고 때때로 부활한다. 그 절망의 순간에 절망을 딛고 하늘을 향해 꽃을 피울 수 있을 때 삶의 환희를 누리지 않겠는가? 그 절망의 순간이 닥쳤을 때 바로 하늘을 향해 꽃을 피울 수 있는 능력, 그건 영원히 사는 것이리라. 순간 싯귀가 스쳐간다. "꽃은 매 순간 피어나니/ 그 순간을 놓치지 마라"



-신경림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하늘에 별이 보이니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이 시에 대한 신경림 시인의 말이다.
"얼마 남지 않은 내일에 대한 꿈도 꾸고
내가 사라지고 없을 세상에 대한 꿈도 꾼다."

나이듦에 대한 총평이다. 이성보다는 마음, 성취보다는 관계, 내세움보다는 겸손. 따뜻한 시선으로 자연과 사회를 대하니,유리창처럼 보이지 않는(투명한) 벽에 가렸던 것들이 비로소 나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초여름 때죽나무 꽃들의 싱그러움이 은하수의 별처럼 보이듯이. 무명(無明)의 더께는 세월속 고난의 더께를 지내오며 명철(明哲)의 세계를 드러낸다.

1975년 신경림의 '농무'를 시작으로 40년 동안 한국시단의 중심을 지켜온 창비시선이 400번을 맞아 기념시선집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를 출간하였다. 박성우, 신용목 시인이 창비시선 301번부터 399번까지 각 시집에서 비교적 짧은 호흡으로 따라 읽을 수 있는 시 한 편씩을 선정하여 엮은 책이다. 두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경우 그중 한권만 택하여 수록하였기에 총 86편의 시가 실렸다. 선정 기준에 대해 “이를 두고 단시(短詩)라고 불러도 좋고 한뼘 시나 손바닥 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 독자들이 가능한 한 여유롭게 시와 마주 앉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짧은 시가 쉽다는 뜻이 아니라 가파른 길을 짧게 나눠서 걸어가면 어떨까 하는 기대 말이다”라고 밝힌다.

"길지 않으나 오래 마음을 흔들어 일렁이게 하는, 아름답고 아프고 따스한 시편들"(박성우 추천사)로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

수록 시인 및 시집

나희덕·『야생사과』 문동만·『그네』 강성은·『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이선영·『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박후기·『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안현미·『이별의 재구성』 최두석·『투구꽃』 남진우·『사랑의 어두운 저편』 이문숙·『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송경동·『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이대흠·『귀가 서럽다』 조연호·『천문』 이정록·『정말』 정철훈·『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이기인·『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장석남·『뺨에 서쪽을 빛내다』 이영광·『아픈 천국』 정복여·『체크무늬 남자』 이세기·『언 손』 이제니·『아마도 아프리카』 정호승·『밥값』 김혜수·『이상한 야유회』 김명철·『짧게, 카운터펀치』 권지숙·『오래 들여다본다』 천양희·『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김태형·『코끼리 주파수』 김윤이·『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 조정인·『장미의 내용』 유홍준·『저녁의 슬하』 송진권·『자라는 돌』 고 은·『내 변방은 어디 갔나』 도종환·『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이장욱·『생년월일』 이혜미·『보라의 바깥』 최금진·『황금을 찾아서』 최정진·『동경』 박성우·『자두나무 정류장』 고광헌·『시간은 무겁다』 문인수·『적막 소리』 이시영·『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이상국·『뿔을 적시며』 문태준·『먼 곳』 김선우·『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백무산·『그 모든 가장자리』 곽재구·『와온 바다』 김중일·『아무튼 씨 미안해요』 김윤배·『바람의 등을 보았다』 진은영·『훔쳐가는 노래』 이병일·『옆구리의 발견』 문성해·『입술을 건너간 이름』 백상웅·『거인을 보았다』 김주대·『그리움의 넓이』 고영민·『사슴공원에서』 김수복·『외박』 김성대·『사막 식당』 함민복·『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주하림·『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김성규·『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김용택·『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김정환·『거푸집 연주』 엄원태·『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박형권·『전당포는 항구다』 공광규·『담장을 허물다』 민영·『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정희성·『그리운 나무』 권혁웅·『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신경림·『사진관집 이층』 유병록·『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황학주·『사랑할 때와 죽을 때』 전동균·『우리처럼 낯선』 정재학·『모음들이 쏟아진다』 신미나·『싱고,라고 불렀다』 손택수·『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이창기·『착한 애인은 없다네』 김희업·『비의 목록』 김사인·『어린 당나귀 곁에서』 최정례·『개천은 용의 홈타운』 김재근·『무중력 화요일』 박소란·『심장에 가까운 말』 고형렬·『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안주철·『다음 생에 할 일들』 이현승·『생활이라는 생각』 안희연·『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박희수·『물고기들의 기적』 김언희·『보고 싶은 오빠』 이병초·『까치독사』

박성우, 신용목 엮음/ 창비/ 188쪽/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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