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의 맛] 빈농의 아들, 까다로운 '강남 손님' 사로잡은 비결

초밥전문점 '김수사' 정행성 사장

외식시장의 전설로 불리는 사장님들이 들려주는 '장사의 철학', 그들의 이야기가 "장사나 해 볼까?" 생각하는 창업 꿈나무들과 장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700만 자영업자들에게 장사의 대한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칼럼을 시작한다. [편집자 주]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김수사'는 강남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식집(1986년)이다. 아버지 정행성 사장과 아들 정재윤씨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부자가 모두 오너셰프다. 아버지가 8년 전 위암 수술을 받은 후 오너로서의 자리만 지키고 있고, 셰프 자리는 아들에게 넘겨줬다.

그런데, 정씨 성을 가진 사장이 운영하는 가게가 왜 '김수사'일까? 정행성 사장이 하얏트 호텔에서 일식 조리사로 일할 때 김씨 성을 가진 단골손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함께 일식집을 하자고 제안을 했던 것. 그때 사장이 김씨였던 터라 가게 이름이 '김수사'였다.

장사가 잘 되지는 않았다. 1년 뒤 김씨 성을 가진 사장에게 가게 인수를 제안 받았다. 인수조건도 좋았고, 장사가 시원치 않았지만 오너셰프라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2금융권의 대출을 받아 '김수사'를 정식으로 인수했다. 이자가 만만치 않은 대출이라 큰 부담을 안고 시작했지만 그만큼 절박하게 모든 걸 걸고 장사를 할 수 있었다.

◇ 작은 디테일이 큰 흐름을 바꾼다

정행성 사장이 가게를 인수하자마자 갑자기 장사가 잘 됐다. 좋은 재료로 열심히 하는 가게는 많다. 그런데 안 되는 가게는 안 된다. 김씨 성을 가진 사장이 들으면 배 아플 일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금이야 어떤 술집에 가도 소주를 마실 수 있지만 당시 일식집 메뉴에는 소주가 없었다. 비싼 일본 술과 양주뿐이었다. 그 공식을 깨고 일식집에 소주라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주전자에 담아서 내놓는 소주는 그야말로 인기폭발이었다. 열광하지 않을 사람이 있었을까?

와인과 위스키의 반입이 무료로 허용되는 것도 이 집의 미덕이다. 다른 가게에서도 몇만 원이면 가능한 일이지만, 그 몇만 원의 차이가 손님들에게는 두 배 세 배 더 큰 행복을 안겨준다.

물론 '김수사'의 성공이 단지 소주 덕분만은 아니다. 그것은 조족지혈에 불과하고 오너셰프로서 새 출발을 한 정행성 사장의 피땀 어린 노력과 정성이 음식 하나하나에, 가게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배어들었을 것이다.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노량진 시장에서 가장 물 좋은 생선을, 농수산 시장에서 가장 신선한 야채를 골라 왔다. 두 군데 시장을 돌고 오면 오전 아홉시 반. 재료를 씻고 다듬어 놓으면 손님이 올 시간이다. 도저히 밥 먹을 시간이 없었고 허구한 날 우유 한 개와 빵 한 개가 점심 식사였다. 앉아서 먹을 시간도 없었다. 그냥 서서 원샷! 그러면서 위장병이 깊어졌다. 다른 사람의 위장을 호강시키는 이가 정작 자신의 위장은 방치하고 홀대했던 것이다.

비단 이것은 그만의 일은 아니다. 식사시간에 일해야 하는 조리사들의 위 건강이 가장 나쁘다는 통계가 있다. 또 초밥을 한 점 한 점을 내주면서 손님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일식 조리사들의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극심하다고 한다. 반면 손님의 만족도가 높으면 그만큼 성취도 역시 높을 수 있겠다.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 아버지의 고단한 삶에 도움이 되고자

정행성 사장은 아들 셋을 뒀다. 막내아들 정재윤씨는 형들과는 달리, 윤택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처음엔 가난했지만 아버지의 노력으로 차츰 생활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막내다보니 하고 싶었던 일은 다 하고 살았어요. 공부는 안했지만…(웃음)."

부모님이 장사하느라 늘 바빴고, 아들 정재윤씨는 놀러 다니기 바빴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20대 초반이었던 정재윤씨는 그날도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놀다가 들어오는 길이었다. 밤새 달린 피곤한 몸을 사우나로 풀어볼까 하던 차에 출근하는 아버지를 봤다. 그때가 새벽 네 시였다.

유독 추위에 약한 아버지가 가장 추운 그 시간에 일어나 눈까지 치우고 출근하는 모습을 보니 아들은 문득 아버지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느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동상 걸린 발을 마늘 물에 담그고 계신 모습을 보고 고생하는 아버지를 도와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그것이 막내아들이 일식 조리사가 된 계기였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롤 모델이다. 특히 아버지의 부지런함을 닮고 싶다.

"아버지에게 게으름이란 건 없습니다. 1년 365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시죠. 지각도 없고 결석도 없습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일까? 아들은 누구보다 근면 성실하다. 아홉 명의 직원이 있지만 직접 가게 문을 열고 닫는다. 가장 일찍 출근해서 맨 마지막에 퇴근을 한다는 얘기다. 조리사도 여럿 있지만 재료 손질을 꼭 같이 한다.

"그래야 그날의 재료 상태를 체크할 수 있거든요."

◇ 변화하되 변하지 마라

정재윤씨가 일식 조리사가 됐을 때 아버지가 주신 첫 번째 선물은 회칼도 아니고 조리사 가운도 아니었다. 손톱깎이였다.

"조리사에게 요리도 중요하지만 청결과 위생은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섭니다…그 후에 칼도 선물했어요(웃음)."

그러나 아버지는 손톱깎이에 담긴 의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잘 헤아렸다. 이후 12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가 주신 손톱깎이는 장롱 속 귀중품 금고 안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아내의 귀금속들과 함께. 그리고 손톱을 깎을 때마다 아버지의 교훈을 되새기곤 한다.

2대를 잇는 아들은 '김수사'에 변화를 원했다. 인테리어도 고급지게 바꾸고 싶었다. 아버지는 투자에는 찬성했다. 하지만 인테리어가 아니라 손님에게 투자하자고 했다.

"비싸서 돈 많이 벌면 나만 즐겁죠. 장사라는 게 손님도 즐겁고 나도 즐거워야죠."

아들이 변화를 시도하려고 할 때마다 아버지는 "변화하되 변하지 말자"고 한다. 너무 앞서가면 손님에게 거부감이 생길 수 있으니 반 발자국만 앞서가라고 한다. 한 발자국도 빠르다고. 반 발자국만 앞서가기에 젊은 아들의 피는 얼마나 뜨거운가. 그것을 알아서일까? 아버지는 늘 "서두르지 말라"고 충고한다. 뭐든지 순리대로, 음식도 순리대로 만들라는 것이다.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초밥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선하고 좋은 재료다. 특히 회는 원재료가 중요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생선은 제일 좋은 것으로 또 남보다 비싸게 사라고 당부한다. 비싸게 사야 좋은 물건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보다 싸게 사서 남보다 비싸게 파는 것이 장사의 재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 장사를 잘하는 이들은 남보다 비싸게 사서 싸게 판다. 조선의 거상 임상옥도 말하지 않았던가.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고.

'김수사'의 가장 큰 미덕은 일류 조리사가 질 좋은 재료로 만든 초밥을 착한 가격에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행성 사장이 '김수사'를 고급 일식집이 아니라 대중음식점으로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는 이유는 뭘까?

그는 전라남도 고흥 출신으로 빈농의 아들이다. 일식 조리사로 일하던 1970년 고향 사람들은 누구 하나 초밥을 먹어보지 못했다. 초밥을 몰라서가 아니라 좀 사는 사람들이나 먹는 비싼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부모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누구라도 오다 가다 들어와 먹을 수 있는, 문턱 낮은 초밥집을 꾸리고 싶었던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장사 철학을 받들어, '변화하되 변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자신만의 장사 철학이 있다.

"누구나 들어와서 먹고, 술 한 잔 할 수 있는 가계가 제 목표입니다. 이야기도 하고 술도 한 잔 하면서 손님과 친구사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친구네 가게에 가면 나를 알아봐주고 뭐라도 더 챙겨주고 편안하다. 그게 아들이 꿈꾸는 '김수사'다.

보통 대를 잇는 식당의 구조를 보면 1세대가 20~30년 고생해서 자리를 잡게 되면 2세대는 주방은 뒤로 하고 카운터나 지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가게는 오랜 노하우로 주인 없이도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철학이 있는 식당 주인은 절대 가게를 비우지 않으며 주방을 장악하고 있다. '김수사'는 틀림없이 그런 가게고 그 철학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고 있다.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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