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부지법 민사22단독 황병헌 판사는 피해자 이모(사건 당시 34세·여) 씨의 부모와 자녀 등 유족이 1억7천여만원을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는 8천여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17일 밝혔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주택가에서 60대 여성이 아들의 여자친구를 흉기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은 지난해 9월 12일 밤 9시 42분쯤.
서울 용산경찰서 등에 따르면, 평소 우울증 약을 복용했던 박모(66·여) 씨는 이날 저녁부터 피해자 이 씨와 전화통화로 심하게 다퉜다. 박 씨는 이 씨가 자신의 아들과 사귀는 것에 대해 반대가 심해 평소에도 다툼이 잦았다.
사건 당일 두 사람이 전화로 심하게 다툰 뒤 이 씨가 박 씨의 용산구 한남동 자택으로 찾아가겠다고 하자 박 씨는 길이 20cm(손잡이 10cm, 칼날 10cm) 과도를 들고 이 씨를 기다렸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아들 이모(35) 씨는 이날 저녁 9시 12분쯤 "어머니가 칼을 들고 여자친구를 기다리고 있다"며 다급하게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를 접수한 112 신고센터는 1분 뒤인 9시 13분, 관할 경찰서인 서울 용산경찰서 한남파출소에 출동을 지시했다.
하지만 신고 접수 10분 전인 9시 2분쯤 아들 이 씨가 신고한 곳에서 약 68m 떨어져 있는 다른 주택에서 가정폭력 신고가 접수됐고, 한남파출소 소속 순찰차 두 대는 엉뚱하게도 이곳에서 칼을 들고 있는 박 씨를 찾느라 출동이 지연됐다.
애가 타던 박 씨의 아들은 9시 27분쯤 "어머니가 칼을 들고 있다"고 재차 신고했지만 이때까지도 순찰차 두 대는 가정폭력 신고 주택에서 길을 헤매고 있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최초 신고 뒤 24분이 지난 9시 37분쯤에야 접수된 신고 두 건이 서로 다른 사건이라는 것을 알았다.
명치에 흉기를 찔린 이 씨는 약 8분 뒤 구급차로 인근 대학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치료 도중 끝내 숨졌다.
사건 현장에서 파출소까지의 거리는 1.7km로 차량 정체가 없을 경우 순찰차로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황 판사는 "주소가 명확히 다르고 상황실이 이에 대해 확인 요청까지 했지만, 24분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직무상 의무를 위반한 과실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이어 "박 씨가 나이 많은 여성이기 때문에 순찰 경관들이 살인사건 발생 전에 현장에 도착했다면 사건을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며 이 씨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순찰 경관들이 박 씨에 대해 일반적인 감독의무를 부담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착오로 대처를 못해 범행을 막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며 국가의 책임을 일부 제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