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민사96단독 이규홍 부장판사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과 이 단체의 사무처장 오모씨가 국가와 서울 종로경찰서장 등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국가는 평통사와 오씨에게 각각 100만원과 3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고 1일 밝혔다.
법원에 따르면 평통사는 지난해 6월 1일 종로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냈다. 6월 4일부터 18일까지 하루 4시간씩 광화문 KT 사옥 앞에서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일본 집단자위권 행사 반대' 등을 촉구하는 집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평통사는 곧 있을 6월 13일에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고 신효순·심미선 양의 13주기 추모행사를 위해 광화문에 분향소를 차리겠다는 내용을 웹자보에 게재했다. 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던 추모제는 행사 당일이 되자 경찰의 제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다른 시민사회단체가 평통사에서 집회 신고를 낸 장소를 선점한 것이 발단이 됐다. 평통사는 해당 단체의 기자회견을 중단시키지 않고, 도로 건너편에 추모 조형물을 내려놓기 위해 차량을 세워뒀다.
그러자 경찰은 "미신고 물품을 반입하는 것은 불법 행위이고, 광화문 광장 하위차로에 차량을 주정차하는 것은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며 차량을 에워쌌다. 평통사 측은 경찰 병력을 풀어주면 차량을 옮기겠다고 밝혔지만, 경찰 병력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차량은 견인 조치됐고, 오씨는 이를 저지하려다 경찰에 연행돼 48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평통사 측은 "순수한 추모제이고, 이미 집회 신고를 한 합법 집회인데도 경찰의 불법 행위로 인해 무산됐다"며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이 부장판사는 경찰이 집회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평통사는 처음부터 신고된 집회 장소가 아닌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상 옆에서 행사를 진행하려 한 것"이라는 경찰의 주장을 이 부장판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화문'은 포괄적인 장소인 만큼 평통사 측이 집회 신고를 낸 '광화문 KT 앞 인도' 역시 광화문이라는 판단에서다. 이 부장판사는 "평통사 측 차량은 추모 조형물을 설치하기도 전에 견인됐고, 차량을 세운 장소는 집회 신고한 곳으로부터 횡단보도를 하나 건넌 장소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 부장판사는 평통사 측이 다른 단체와 함께 중복 집회를 개최했어야 한다는 경찰의 주장도 배척했다. 이 부장판사는 "오히려 시민들의 불편을 가중시킬 수 있고 버스정류장 등이 있어 사고 위험성을 높일 수 있다"며 "무엇보다 현대사회에서 중요성이 더해지는 집회의 자유가 지나치게 소홀히 취급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 부장판사는 차량 견인 행위를 엄중히 질책했다. 이 부장판사는 "경찰이 병력을 풀어달라는 평통사 측 의견을 수용했다면 단순한 차량 이동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 협약이나 경찰관 직무집행법은 견인 조치의 구체적 근거로 적용될 수 없는 내용이거나 요건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견인 행위는 인권존중과 권력남용 금지, 신의성실과 같이 공무원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준칙이나 규범을 지키지 않았거나 객관적인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차량 견인을 저지하려던 오씨에 대해서는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반대하며 차량 견인을 방해한 행위에 위법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오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한 행위도 과실에 의한 불법 행위"라고 규정했다.
이 부장판사는 "국가가 집회의 자유를 제한해 원고들이 상당한 정신적 고통 등 손해를 받았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고의적인 중과실에 따른 위법한 직무집행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종로경찰서장 등 경찰관들의 손해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아울러 이 부장판사는 "집회 내용에 고인들을 기리고 추모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지만, 집회 목적이 '일본 집단자위권 행사 반대' 등으로 돼 있어 순수한 추모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