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서울 구로구청 건물에는 뜨거운 긴장감이 고조됐다.
인터넷과 SNS도 없던 시절이지만, 구로구청에 운집한 사람들은 야당 당원들까지 합해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의 눈빛은 1980년 전남도청을 사수하려던 광주시민들 못지않았다.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투표 때의 일이다.
◇ '전남도청 사수' 외치던 시민들의 결연함 재연
시작은 한 시민의 문제제기였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 후보 등이 나선 13대 대통령 선거의 투표가 한창인 1987년 12월 16일 오전 11시쯤.
구로구청에 마련된 구로을 투표소에서 선관위 직원들이 식빵 상자에 투표함 하나를 실어 빠져나왔다.
한 시민이 '부정선거 아니냐'고 막아서자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군부 정권에 대한 반발, 그리고 그러한 군부 정권이 다시 연장될 수 있다는 염려가 깊던 때였다.
시민들과 선관위 직원들의 승강이 속에 구로구청에 모인 군중들은 수백명으로 불었고 이들은 선관위 사무소를 점거한 채 관련 서류들을 불태웠다.
투표가 종료된 뒤에도 1000명이 넘게 늘어난 청년, 시민, 야당 당원들은 밤샘 농성을 이어갔다.
결국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소식은 오히려 이들의 싸움에 결연함만 더했다.
투표함 하나를 둘러싸고 뜬눈으로 이틀밤을 보낸 18일 오전 8시, 헬기까지 동원한 4000여명의 경찰들이 곤봉과 방패를 휘두르며 들이닥쳤다.
사방에서 터지는 최루탄 속에 시민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했고 유리창들이 깨지고 화염이 치솟는 구로구청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학생 620명 시민 414명이 연행돼 208명이 구속됐으며, 당시 서울대 경영학과 2학년 양원태 씨는 구청 옥상에서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다.
'구로항쟁'으로까지 불렸던 사태 끝에 문제의 투표함은 시민들의 피가 흥건한 구청을 떠나 선관위로 넘겨졌다.
하지만 개봉해 의혹을 가리지는 못한 채 4325명의 표는 모두 무효처리됐다.
선거 관련 서류가 모두 소실돼 본인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고, 당선 후보와 차점 후보의 차이가 95만 표나 돼 투표함에 든 표가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선관위 측은 '선관위 직원들이 개표장이 멀어 미리 부재자 투표함을 옮기는 과정에서 투표함을 바꿔치기 하려 한 것으로 학생들이 오해해 빚어진 일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야당은 선관위 관계자를 고발하고 국회에는 선거부정조사특위까지 구성됐지만 부정선거의 증거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2001년 김대중 정부 때는 이 사건으로 구속됐던 문광일 씨 등 3명이 민주화운동가로 인정돼 재평가 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투표함 개봉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선관위 수장고에 29년간 보관돼온 문제의 투표함이 곧 개봉된다.
한국정치학회 요청을 받아들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다음달 14일 오후 투표함을 열고 부정투표 의혹을 검증하기로 한 것이다.
선관위는 "내년 민주화운동 30주년과 19대 대선 등을 앞두고 그간 계속돼온 부정 투표함 논란 등을 해소하고 선진 선거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정치학회의 종합결과보고서는 오는 8월 30일까지 선관위에 제출될 예정이다.
이제 그 보고서에서 기대되는 건, 해묵은 부정선거 의혹의 진위 여부보다 '내 한표를 지켜 민주주의를 이뤄내겠다'는 당시 시민들 열망의 확인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