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의 "산업은행은 들러리였다"는 발언에서 촉발된 산업은행-정부 간 부실 책임 떠넘기기 공방에 대우조선까지 가세하면서 대규모 공적자금의 증발을 둘러싼 '네 탓 공방'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고 전 사장은 최근 서울중앙지법 재판부에 낸 준비서면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대우조선 분식회계로 손해를 입은 소액 주주들이 대우조선과 고 전 사장,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다.
고 전 사장은 지난 2012년 3월부터 2015년 5월까지 대우조선의 대표이사를 지냈다. 대우조선의 분식회계는 고 전 사장과 그의 전임자인 남상태 전 사장의 재임 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검찰은 파악하고 있다. 두 사람은 출국금지된 상태다.
고 전 사장은 서면에서 "2013·2014 회계연도 당시 대규모 손실에 대해 구체적인 보고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대규모 손실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며 "회계처리는 대표이사로부터 독립성이 강한 회계부서가 담당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외부 감사인으로부터 엄격한 감사와 대주주이자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과 산업은행 출신 CFO(최고재무책임자) 감독 하에 이뤄지기 때문에 대표이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고 전 사장은 "대규모 손실을 회계상 반영해야 한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은폐하거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회계수치에 대한 수정·변경·조작 등을 지시하는 행위를 한 사실이 결코 없었다"며 책임론을 반박했다.
이런 발언은 고 전 사장과 임기가 겹쳤던 홍 전 회장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홍 전 회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산업은행이 대주주라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대주주의 역할이 제한돼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대우조선 사장은 산업은행보다 더 큰 배경을 갖고 있었고, 모 사장 때는 산업은행에서 파견된 감사를 잘랐다. 그런 상태에서 정확한 회계 부실을 감지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특히 청와대와 금융당국이 실질적인 구조조정 방식 등을 결정했기 때문에 산업은행은 들러리에 불과했다는 홍 전 회장의 발언은 재계와 정치권에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키며 '책임 떠넘기기' 공방의 도화선이 됐다.
이후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대우조선 지원 결정이 국책은행의 의견을 묻지 않고 협의 없이 진행됐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며 사태 진화에 나섰고, 청와대는 "한 개인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대우조선의 구조 조정을 위해 6조원 이상의 대규모 공적자금이 투입됐음에도 당사자인 대우조선과 대주주인 산업은행, 금융당국, 정치권 모두 '모르쇠'로 일관한 채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어 비난이 일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난 8일 대우조선과 산업은행 등지를 압수수색한 검찰은 이들의 유착관계와 함께 분식회계의 최종 책임자를 규명하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일각에서는 검찰의 칼끝이 정·관계 인사들을 향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