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등 뒤의 숫자를 통해 생명의 소멸을 읽는데…

임선경 장편 소설 '빽넘버'

임선경의 장편소설 '빽넘버'는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중상을 입은 청년 이원영이 다른 이의 등에 쓰인 '숫자'를 보는 능력을 갖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죽음이라는 무겁고도 운명적인 소재를 담담하고 유머러스한 문투로 일상에 녹여냈다.

대학생 이원영은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상가(喪家)에 다녀오던 중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른다. 다시 고속도로로 나갈 때 안전벨트 매는 것을 깜빡 잊은 덕분에, 곧이어 맞닥뜨린 교통사고에서 부모님을 잃고 혼자 살아남는다.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깨어난 이원영은 자신에게 이상한 능력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들의 등에 연한 녹색의 숫자가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 숫자는 오직 원영에게만 보인다.

원영은 곧 그 숫자, '백넘버'의 의미를 알게 된다. 스스로의 등을 볼 수는 없으므로, 당연하게도 원영은 자신의 백넘버만은 알 수 없다. 등 뒤의 숫자를 통해 생명의 소멸을 늘 '보고 있던' 원영은 어느 날 우연히 한 카페에서 젊은 남녀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등에 백넘버가 없는 남자와 맞닥뜨린다. 곧 원영은 백넘버가 없는 그들의 정체와 부모님을 잃은 사고 직전, 휴게소에서 스쳐 지나갔던 남자에 대해서 알게 되는데…….

책 속에서

사실은 아까부터 여자의 등을 보는 것을 피해왔다. 뒷모습이 보인다 싶으면 시선을 돌렸다. 그건 이미 습관이거나 버릇이다. 길을 걸을 때는 앞사람의 등을 보게 될까 봐 고개를 숙이고 발밑을 보며 걷는다. 얘기하던 상대가 내 앞에서 돌아설 때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눈길을 돌린다. 그렇지만 이렇게 여자의 등 뒤에 서서 머리를 드라이해주는 상황에서는 등을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괜찮다. 보이면 보는 거다.

숫자가 보였다. 연한 녹색으로 약하게 발광하는 숫자. 18259라는 다섯 자리 숫자였다. 숫자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머리는 벌써 제멋대로 계산에 들어간다. 계산을 해볼 것도 없다. 다섯 자리 숫자면 일단 30년 이상이다. 1만8천까지 갔으니 50년?


내가 처음 어떤 사람의 숫자를 본 것은 바로 그 중환자실에서였다. 마른 낙엽처럼 쪼그라든 한 할머니가 중환자실로 실려 들어왔다. 할머니는 초등학생처럼 작았다. 작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옆으로 누워 있어 보자기 한 장이면 다 싸맬 수 있을 정도였다. 할머니의 몸에는 이미 어떤 생기도 남아 있지 않아서 정형외과의 무릎반사 해머로 톡 쳐도 팍삭 깨지고 부스러질 듯이 보였다. 할머니의 등에 6이라는 숫자가 있었다.

“지금 보믄(보면) 봄도 이자(이제) 끝이다…….”
“네?”
할머니가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아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사 내년 봄을 또 보겠나……?”

음…… 그러려나? 그럴 수가 있으려나? 자연스럽게 포항 할머니의 웅크린 등, 회색 스웨터 위의 숫자로 눈이 갔다. 할머니의 숫자는 백을 겨우 넘겼다. 앞으로 석 달 남짓. 할머니는 내년 봄을 보지 못할 것이다. 쏟아져 내릴 듯한 개나리도 눈처럼 휘날리는 벚꽃도 지금 보는 것이 마지막이다. 팔십 몇 번을 반복한 할머니의 봄 구경은 이제 끝났다. 그런 거였군. 지금 보는 것이 마지막일지도 몰라서, 이 계절을 내년에도 후년에도 또 보리라는 확신이 없어서 노인들은 그렇게 색색으로 차려입고 고속도로를 꽉 채워 꽃구경, 단풍구경을 떠나는구나.

노트북 남자가 카페 밖으로 나갔다. 그 남자의 등이 보이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없었다. 백넘버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입은 진한 회색의 재킷 등판은 깨끗했다. 혼란스러웠다. 중환자실 할머니의 등에서 처음 숫자를 봤을 때보다 오히려 더 놀랐다. 뭐지? 저 사람?

나는 남자를 따라 나갔다. 남자는 카페에서 10m쯤 떨어진 건널목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남자 옆에 섰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 누구야? 묻고 싶었다. 남자 뒤에 바짝 섰다. 그때 남자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당히 하지.”

임선경 지음/들녘/240쪽/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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