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멜 자신이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은 "예술작품을 역사적으로, 기술적으로 또는 미학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철학적으로 예술작품의 의미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추구 하는 연구"이다. 즉 작품 창작의 역사적 맥락에 근거한 평가나 도상학적 해석, 기법상의 탁월함을 논하지 않고, 예술작품 그 자체의 총체성과 개별성에 근거해 내적 의미를 찾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해석 방식으로부터 우리는 이미 익숙히 알고 있다 생각했던 렘브란트 의 예술세계를 새롭게 바라볼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 전체와 인간, 그리고 삶 자체를 이해하는 방식에 관한 성찰이 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짐멜은 렘브란트의 예술세계를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로댕 등의 예술 세계와 비교하고 있다. (그 외에도 고야, 라파엘로, 루벤스, 벨라스케스, 보티첼리, 브뤼헐, 조르조 네, 카라바조 등도 함께 거론되는데, 이렇게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 세계를 동시에 다루는 예는 달 리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짐멜에 따르면, 일단 다른 예술가들과 달리 렘브란트는 예술적 표현의 대상을 단순히 사실주의적이거나 자연주의적인 방식으로 그대로 수용하고 모사하지 않는다. 또한 고전주의에서와는 달리 예술적으로 표현해야 할 실재적인 삶에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타당성을 요구 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예술에서는 반드시 따라야 할 어떠한 규범적인 형식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형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형식이란 어디까지나 그때그때 삶의 순간일 따름이다. 바로 이 순간에 절대 물러나지 않으면서 형식을 통일 적으로 규정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형식이란 〔…〕 그저 삶의 본질, 다시 말해 삶의 생성이 외부 로 향하는 우연적인 방식일 따름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에서처럼 고전예술과 렘브란트에서 궁극적 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삶과 형식의 통일성, 그러니까 순수한 사유에서는 획득할 수 없어 보이는 것을 예술적으로 획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전예술은 형식으로부터 삶을 찾고, 렘브란트는 삶으로부터 형식을 찾는다.
이는 짐멜의 생철학적 관점과 연결되는 것으로, 생철학에 의하면 연속적으로 흐르는 삶은 불가피하게 끊임없이 형식을 바꾼다. 또는 달리 말해 삶은 "변화하는 내용들과 더불어 진행되는 과정의 형식"을 갖는다.
이에 비해 미켈란젤로의 예술작품은 초개인적이고 초경험적으로 개별 인간의 존재와 운명 을 초월하는 세계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는 주체적 개인의 단편적이고 유한한 현존재가 이 세상을 초월한 완전함과 무한함 그리고 절대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르네상스의 이상을 반 영하는 것이다.(초시간성) 그러나 그러한 이상은 경험세계에 확고히 뿌리를 내린 개인의 삶으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여기서 비극이 발생한다.
반면 렘브란트가 일방적으로 이상적이고 고귀한 인간만을 예술적 형상화의 대상으로 보는 고전주의와 달리 소시민이나 프 롤레타리아트, 그리고 유대인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의 역사를 포용했다는 사실은 그가 경험적이고 개인적인 다양한 삶의 순간과 운동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음 을 보여준다.
개인적 삶의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전체 삶이다. 삶의 매순간 개인의 영혼이 발현되고 있고, 이를 화폭에 온전히 담아낸 것이 렘브란트였다. 이는 렘브란트의 수많은 초상화들 특히 자화상과 종교화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그의 초상화들은 대상을 그대로 모사하거나 또는 이상화/유형화하지 않고, 그 대상이 된 개인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자화상들이 특히 그러한데, 그 각각의 작품들에는 그것이 어느 시기에 그려졌든 간에 시간의 흐름 이(죽음까지) 반영되어 있다.(시간성) 마찬가지로 종교화에서도 이상화나 숭고화를 찾을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서와 달리 그의 그림들에서는 종종 예수 그리스도가 희 미하거나 초라하거나 연약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어떤 인위적인 종교적 분위기도 부여 되지 않지만, 예수를 비롯한 인물들의 손짓과 표정 등은 그대로 그들의 신앙심, 영혼의 종 교성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는 렘브란트의 그림들에 고유의 통일성, 총체성을 부여하는데, 이 통일성은 그림 속 인물들의 영혼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의 운동성을 통해 획득된다.
요컨대, 렘브란트 예술의 새로운 점은 예술의 형식에 있었다.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형상화된 순간은 개인 삶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유기적-시간적 통일체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짐멜에 따르면 미켈란젤로의 초시간성(삶의 과정으로부터 추상화된 순간이 낳은 초시간성), 렘브란트의 시간성, 로댕의 비시간성(진동하고 전율하는 절대적인 생성이 낳는 비시간성) 은 각각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및 현대라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삶의 유형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각각 보편적 인류의 초시간적 삶, 유일무이한 개인의 시간적 삶, 익명성 속에서 자유부동하는 대도시인의 비시간적 삶을 예술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짐멜은 렘브란트를 합리주의적 미학이론, 특히 칸트의 미학이론과 대비한다. 예술작품의 균일성, 명확성 및 조망성을 강조하는 칸트의 미학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형식을 강조하며, 그에 따라서 색채의 기능과 의미를 부정한다. 이러한 형식의 이상은 칸트에 의하면 선 (線)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선은 기하학적 원리에 입각해 그림에 단순하고 명쾌한 구조와 질서를 줄 수 있음이 그 근거이다. 그러나 선으로는 삶의 다양한 기제와 운동 과정을 적절히 표현할 수 없다고 짐멜은 확신한다. 왜냐하면 영혼과 삶의 운동은 선을 이용한 명료한 표현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칸트의 미학이론은 개인과 그의 삶으로 부터 괴리된 지성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이론, 더 나아가 기계론적인 이론이라고 짐멜은 비판한다. 이는 예술에 관한 합리주의적 이론에 대한 비판일 뿐 아니라, 삶에 대한 합리주의적이고 기계론적인 이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짐멜은 이 책에서 유일무이한 개인의 시간적 삶이 지닌 역사성에 주목하고 있다.
게오르그 짐멜 지음/김덕영 옮김/길/340쪽/2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