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회사를 그만두고 집안일만 하던 스물아홉의 여자주인공 '동미'가 삶의 변화를 찾기 위해 집을 나간 뒤 겪는 여러 가지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을 사랑스럽게 또는 잔잔하게 수채화를 그리듯 써낸 작품이다. 동미의 가출로 시작된 소설은 낯선 동네의 카페 '모퉁이'에 취직하면서 그곳에서 만난 젊은 네 남녀의 삶과 사랑을 들춰내 지금 한국사회의 젊은 청년 세대의 인생과 모습을 포착해낸다. 빠르게만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 더딘 걸음걸이를 재촉하려는 듯 인물들 일상의 세세한 사건사고를 통해 한국 청년들의 '삶'에서 놓치기 쉬운 아름다운 비밀들을 하나하나씩 풀어내는 묘미가 있다.
또 신예작가의 시선이 다분히 따뜻하고 다정다감할 뿐만 아니라 호들갑스럽지 않게 인물들이 내뱉는 차분한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동안 등한시했던 우리 주위의 고립되고 소외받는 청년 세대의 소중하고도 은밀한 '삶'의 이야기가 각별해지고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본문 중에서
길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스타 고시원을 올려다보던 동미의 뒷모습과, ‘스타 고원시’에서 ‘스타 고시원’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뒤죽박죽이 되던 문짝의 배열. 외로워한다고 느꼈다. 윤아에게 배신당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실의에 잠겨 밤낮 쉴 새 없이 걷고 또 걷던 때, 선호도 그랬다. 선호의 마음속에 들끓던 감정은 윤아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사람에 대한 헛헛함이었다. 이제 누굴 믿어야 하나, 그런 두려움. 그 시간을 걷고 걸어서 건넜고, 선호는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있다. 그때, 한 걸음 앞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공허함이 있을 것 같아 가슴이 턱턱 막혔다. 그래도 한 걸음씩 내디뎠다. 지나고 보니 그 시절, 자신을 지켜보는 눈빛이 있었다는 생각. 누군지는 모르지만,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눈빛이 있었을 것 같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기 앞에 뻗은 길을 한 걸음씩 내디디며 매순간마다 가슴이 헛헛해질지도 모르는 동미에게, 그런 눈빛 중의 하나가 되어주고 싶었다. ― 95쪽
"그들의 삶이 참으로 사랑스럽고 현명하므로, 소설을 읽다 보면 그들은 어느 순간 숭고해지고 결국엔 우리로 하여금 이 지옥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 살아가야 할 이유들을 숙고하게 만들고야 만다. -김형중 문학평론가 '추천사' 중에서
하유지 지음/은행나무/280쪽/12,000원
이 소설은 1982년 실제로 호주에서 발생했던 리네트 도슨 실종사건을 토대로 한다. 잘생기고 매력적인 학교 선생의 아내가 홀연히 사라지고, 어느 날부턴가 그 집에는 열여섯 살짜리 제자가 함께 살게 된다. 경찰은 남편을 의심했지만 어디에서도 아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사건은 미제로 남았고, 리네트의 가족들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그녀를 찾고 있다.
이 실제 사건에서 출발한 작가 마이클 로보텀은 스스로가 세 딸을 키우면서 겪었던 기쁨과 공포, 그리고 아슬아슬한 소녀들의 사춘기를 담아 사실적이고도 아름다운 스릴러를 완성했다.
.
<내 것이었던 소녀>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소녀들에 관한 이야기이자, 소녀들을 자식으로 둔 모든 부모에 관한 이야기다. 부모가 된다는 행복부터,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슬픔, 커가면서 점점 멀어져가는 자식에 대한 상실감까지, 아버지로서 로보텀이 느낀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그래서 로보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우리를 공포로 벌벌 떨게 하기보다는 가슴 아프게 한다. 긴 여운 속에서, 한때 소녀였던 사람이라면 자신의 소녀 시절을 반드시 떠올리게 될 것이고, 부모라면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나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슬픈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들이 밝고 생기 넘치게 자라는 것을 보는 기쁨은, 매 해가 또 다른 무언가의 마지막을 가져온다는 생각에 약해진다. 마지막으로 딸아이를 그네에 태워준 때. 내가 마지막으로 이빨요정이나 산타클로스 흉내를 냈던 때. 마지막으로 동화책을 읽어준 때.
딸아이들에게 딱 한 가지만 조언을 할 수 있다면 첫 경험을 최대한 즐기라고 말하고 싶다. 첫 키스, 첫 데이트, 첫 사랑, 첫 아이의 첫 웃음…….
그런 것들은 오로지 하나뿐이니까.
-본문 중에서-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북로드/ 594쪽/ 14,800원
액자 속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진짜 비극의 주인공인 팀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속 맥베스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인물이고, 덩컨 미드는 『맥베스』의 덩컨 왕처럼 예민하고 섬세하다. 팀과 버네사의 첫 만남과 이후의 삼각관계는 구성에 있어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얼마간 빚을 지고 있다. 자신감의 결여, 의심, 죄책감 같은 일상적이고도 ‘비극적인 결함’ 탓에 작은 실수를 반복하다가 끝내 운명적으로 비극을 맞게 되는 인물들에게서 명작이라 불리는 고전들 속 비극적 인물들이 언뜻언뜻 비칠 때 그것을 포착하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본문 중에서
출발점은 사실 다른 많은 것들의 종착점이기도 하다는 걸 이제는 여러모로 잘 알고 있으니까. _19쪽
하지만 더이상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의미란 건 영원히 없겠지. 버네사가 그 선생님 놀이
그는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 시간을 다시 살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절대로. 앞으로 평생 시달리지 않을까 우려되는 그 끔찍한 장면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마지막 몇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_278쪽
엘리자베스 라벤 지음/엄일녀 옮김/문학동네/336쪽/13,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