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수사 대상자가 아닌 변호인이 피의자나 피고인의 변론을 맡았다는 이유만으로 민감한 개인정보가 담긴 통신자료를 털린 셈이어서 궁극적으로는 변호사의 변론권마저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4일 CBS노컷뉴스 취재 결과 국정원 등 수사기관이 이동통신사로부터 통신자료를 받아간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최소한 15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이동통신사를 상대로 통신자료 제공사실을 개별적으로 조회한 결과다.
이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조회를 당한 변호사는 설창일 민변 통일위원장인 것으로 드러났다. 설 위원장이 본인의 통신사에서 확인한 '통신자료 제공현황'을 보면, 국정원과 검찰, 경찰이 요청한 통신자료 건수는 무려 17건에 달했다.
지난 8일 하루에만 의정부지검에 설 위원장의 통신자료 2건이 제공됐고, 지난달 26일 경기경찰청에도 통신자료 2건이 넘어갔다. 또 경찰청에서는 지난달 2건, 지난 1월 1건, 지난해 9월 1건, 같은 해 7월 3건 등 모두 7건의 통신자료를 요청해 받아갔다.
서울경찰청은 지난해 9월 1건, 같은 해 6월 3건, 같은 해 5월 1건 등 모두 5건의 통신자료를, 국정원은 같은 해 7월 1건의 통신자료를 넘겨 받았다. 설 위원장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등 민감한 개인정보가 고스란히 수사당국에 노출된 것이다.
설 위원장은 "수사기관이나 통신사로부터 아무런 사후 통지를 받지 못했다"며 "수사기관이 통신자료를 요청한 날짜 중 짐작되는 사건이 일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왜 요청했는지 전혀 가늠이 안 된다"고 말했다.
설 위원장은 지난 2013년 변호인으로서 이석기 전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의 변론을 맡았었고, 최근에는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의 변호를 맡아 "종북 콘서트 발언은 무죄"라는 판결을 받아낸 바 있다.
지난해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무죄를 받은 김호 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청년학생본부' 집행위원장의 변론을 맡았었고, 북한인권법 제정 반대 기자회견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설 위원장은 지난해 3월 참여연대가 "국정원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에 개입한 의혹이 있다"면서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한 사건의 법률 대리인으로 참여한 바 있다.
민변 미군문제연구위원장을 맡고 있는 하주희 변호사의 통신자료도 수사기관에 넘겨진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달 경찰청은 하 위원장의 통신자료 1건을 받았으며, 지난해 국정원과 국군 모 부대, 서울중앙지검, 인천경찰청이 각각 1건씩 통신자료를 건네받았다.
민변 장연희 사무차장도 지난해 3월부터 8월까지 경찰청으로부터 3건, 국정원과 서울경찰청, 남대문경찰서, 경기경찰청으로부터 각각 1건 등 모두 7차례 통신자료를 조회 당했다.
장 사무차장은 "피의자의 통신자료와 같은 문서번호가 달린 변호인도 있다"며 "수사기관이 피의자와 변호인을 상대로 동시에 통신자료 제출을 요구한 것이라면, 변론권 침해 소지가 있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 위원장도 "피의자나 피고인을 변론했다는 이유만으로 변호인의 통신자료가 항상 제공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자신의 개인정보가 어떻게 사용될지를 우려해 변론을 꺼리게 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는 만큼 문제의 심각성이 상당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민변이 회원 1000여 명을 대상으로 통신자료 제공 사례를 취합하고 있는 만큼 수사기관에 통신자료를 조회 당한 변호사들의 숫자는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개인의 신상정보를 담고 있는 통신자료는 전기통신사업법 83조 3항에 따라 수사기관이 이동통신사에 요청하면 영장 없이도 받아볼 수 있다.
수사기관에서는 피의자 또는 피의자와 통화한 휴대전화 가입자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일 뿐 통신자료가 남용되는 경우는 결코 없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통신자료도 엄연한 개인정보라는 점에서 현재의 수사 관행이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앞서 지난해 1월 서울고법은 임모 씨 등 3명이 '수사기관에 개인정보를 제공한 뒤 내역을 알리지 않았다'며 이동통신 3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통신사들은 각각 20~30만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자료제공 현황 공개는 헌법상 기본권인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실현하는 것으로서 수사 편의보다 보호 가치가 더 크고, 통신사들은 자기결정권을 침해 당한 이용자들의 정신적 고통에 대해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반면, 경찰 측 반론은 이렇다. 강신명 경찰청장이 지난 14일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통신자료는 워낙 건수가 많고 상대적으로 인권침해 개연성이 감청보다 덜하다. 수사기관에 (개인정보를) 잘 관리해서 수사하라고 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일선 수사관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개인정보를 유출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의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실제로 무심결에 피의자에게 피해자의 이름과 직업 등 신상정보를 알려주거나 뇌물을 받고 개인정보를 유출해 징역형을 선고 받은 경찰관들의 사례가 언론에 종종 보도되고 있다.
민변 관계자는 "통신자료가 수사기관에 제공된 민변 회원들의 사례를 기관별·날짜별로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며 "향후 법적으로 대응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