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망받는 디자이너로 자신의 꿈을 막 펼치기 시작했던 쥐디트는 갑작스럽게 뇌전증(간질) 진단을 받는다. 정밀 검사를 통해 악성 뇌종양을 발견한 이후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마침내 엄마마저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쥐디트는 고통스러운 병의 증상과 자신이 겪어야 했던 상실감을 섬세한 필치와 개성 있는 그림체로묘사한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며 신파적 감상에 빠지지 않는 작가의 용감한 서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엘로디 뒤랑은 과감하고 유려한 데뷔작으로 2011년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전도유망한 신인작가에게 주는 Révélation상을 수상했다.
작가는 주인공에게 '쥐디트'라는 이름을 붙이며 인물에게 또 다른 정체성을 부여하고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었다. 수년간 자신의 병을 부인해왔던 탓에 자기 자신의 일처럼 여기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쥐디트가 병으로 인해 기억을 잃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불과 20대 초반이었다. 본인조차 예측할 수 없는 언행을 하거나 발작을 일으키지만 발작 이후에는 필름이 끊기듯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 때문에 쥐디트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고 심각한 병세에도 논문을 쓰겠다며 끙끙댔다. 점차 돌아오리라 믿었던 기억의 손상은 결국 쥐디트의 일상을 강타했다. 자신의 이름도, 주소도, 알파벳도 떠오르지 않는 나날들. 언어능력과 생각하는 힘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쥐디트가 할 수 있는 건 그림을 그리는 일뿐이었다. 가장 아팠던 당시 노트에 거칠게 그린 '고통의 스케치'들은 이 작품의 원료이자 시발점이 된다. 작품 곳곳에 언뜻 낙서처럼 보이는 이 그림들은 투병의 질곡 속에서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쥐디트의 긴장과 불안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쥐디트는 4년 만에 만난 친구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고 보냈는지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쥐디트의 뇌전증을 촉발했던 것은 뇌 깊숙이 숨어 있던 새끼손톱만 한 종양이었다. 그 작은 종양이 얼마나 크게 자신의 삶을 뒤흔들지 쥐디트는 알지 못했다. 실력과 감각을 겸비한 디자이너였지만 이제 <모나리자>도 <절규>도 알아보지 못한다. 알파벳을 순서대로 나열하지도 못하고 간단한 덧셈뺄셈도 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조카의 이름을 외우지 못해 불러줄 수 없다. 아주 기초적인 것조차 기억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은 쥐디트에게 가장 큰 공포로 다가온다. 쥐디트는 자신의 병을 완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상태이지만 전문 병원을 찾아가 치료의 긴 여정을 시작한다.
<내 인생의 괄호>에서 병과 치료에 관한 이야기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뇌종양을 제거하는 감마유닛 치료 과정을 묘사할 때는 아예 교육적인 서술 방식을 선택해 의학 기술이나 시술 과정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그럼에도 차갑고 두려운 병원의 서늘한 공기는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괄호 쳐진 인생의 한 토막, 기억의 파편들을 이어 붙여 완성하다. 기적적으로 병을 완치한 이후, 엘로디 뒤랑은 이 만화를 그리면서 병으로 인해 사라진 몇 년간의 기억을 복구했다.
아주 곤혹스러운 과정이었지만 그 경험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싶었다. 혼란에 빠진 기억의 파편들을 재조합하고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순차적으로 정리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부모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러한 부모님과의 대화와 전화 통화 내용이 작품 곳곳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는데, 이 장면들은 그가 질병과 맞서면서 맞닥뜨린 텅 빈 공간을 메아리치는 울림과도 같다. 쥐디트는 가족들에게 들은 이야기로 잃어버린 시간들을 이어 붙이며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에 관한 특별한 기록을 완성했다.
출간 소감을 묻는 인터뷰에서 엘로디 뒤랑은 '이제 괄호는 닫혔다'고 말한다. 그에게 열린 채로 남아 있던 괄호는 그 시간을 충실하게 복구해내는 노력을 통해 완전하게 닫힐 수 있었다.
엘로디 두랑 지음/이예원 옮김/휴머니스트/228쪽/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