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현대 자본주의와 관료제 사이의 끈끈한 밀월관계와 이로 인해 파생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낱낱이 파헤친다. 또한 우리가 불만 속에서도 관료주의 체제에 속수무책으로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는 온갖 종류의 속임수나 덫들에 관해 조명하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폭력을 앞세운 문제해결 방식에 대해 전근대적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1장에서 폭력이야말로 관료주의를 움직이고 유지하는 막강한 힘임을 강조한다. 즉 추상화된 관념들로 포장된 폭력이 아닌 일종의 공권력으로 불릴 수 있는 구조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다. 그러한 구조적인 폭력은 때때로 우리의 상상력마저 마비시킨다. 저자는 폭력이 어떻게 사회 곳곳에서 우리의 행동 전반을 암묵적으로 통제하는지에 관한 메커니즘을 파헤친다.
2장에서는 한때 우리 모두를 설레게 했던 미래의 청사진(순간이동 장치, 날아다니는 자동차와 스케이트보드, 불로장생약 등등)이 왜 현실화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분석한다. 즉 관료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상상력 넘치는 기술들을 왜 외면했는지, 그러한 기술에 대한 집착은 어째서 유치한 망상으로 치부되고 있는지를 말이다. 또한 자본은 기술의 어떤 분야로 집중되었고, 그런 분야에서 이룩한 찬란한 성과라는 게 고작 어떤 것들인지에 관해서도 파헤친다. 현대의 과학기술이 우리의 삶을 더욱 옥죄는 수단이 된 메커니즘에 관해서도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3장에서는 우리가 관료주의에 대해 불평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거기에 매료되어 체제가 유지되도록 기꺼이 동조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저자는 놓치지 않는다. 놀이와 게임 등의 예시를 통해 관료주의의 대안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된 우리의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글에서, 저자는 영화 ⌜배트맨⌟을 통해 법의 이름으로 국민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공권력을 예리하게 통찰한다. ⌜배트맨⌟에는 거리를 점거하는 군중이 테러리스트처럼 묘사된다. 저자는 이 영화의 제작진이 월가점령시위의 평화시위 군중을 폭력집단으로 묘사했다고 지적한다. 배트맨은 폭력집단을 물리치는 슈퍼 영웅으로 그려지지만, 실은 공권력이라는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집행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 규제철폐는 관료주의적 간섭을 덜어내는 혁신일까?
오늘날 정치판에서 자주 거론되는 말 중 '규제철폐(deregulation)'가 있다. 얼핏 보기에 이 말은 관료주의적 간섭을 덜어냄으로써 혁신을 끌어내고, 각종 규칙과 규제를 줄여주는 의미로 다가온다. 과연 '규제철폐'라는 게 온전히 규제를 없애 버린다는 의미일까? 안타깝게도 그 말은 각 이익단체나 의사결정권을 가진 이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규제의 구조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규칙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고 싶을 때마다 규제철폐라는 이름을 앞세워 마치 관료주의를 줄이고, 개인에게 주도권을 돌리는 방법인 양 눈속임을 하는 가운데 규칙은 점점 더 복잡하고 치밀해졌다. 나아가 그 규칙을 관리하는 관료들의 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개인의 자유는 그만큼 줄어들었으며, 처리해야 할 서류들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현대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경계해왔다. 학자나 의사, 교수들조차 연구에 몰입하는 이상으로 행정 업무에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 말로는 창의성을 부추기지만, 실상은 온갖 종류의 잣대를 마련해놓고 거기에만 맞출 것을 강요하는 개성 없고 획일화된 시스템이 구축되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현대 사회에 살아온다면, 연구 개발비를 타내는 문제나 논문 통과조차 수월치 않았을 거라는 지적은 관료주의 사회가 얼마나 개인의 창의성을 말살하는지, 또한 온갖 종류의 규제와 규칙들이 개인의 삶을 얼마나 제한하는지 돌아보게 해준다.
저자는 인류의 위대한 성취는 항상 돈키호테 같은 엉뚱한 환상 추구의 결과였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그러한 환상이 오히려 더욱 독단적인 권력창출로 이어졌고, 결국 규칙 속에 질식당하는 현실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에 우리는 더 나은 뭔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조차 하지 못한 채 불만을 참고 현실에 수긍한다. 우리는 지금 이 현실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 관료주의의 다양한 측면에 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음을 언급한다. 다른 상상을 해야 한다.
본문 중에서
"중년의 노동자가 설명해주기를, 그 공장에는 수년에 걸쳐 딱 두 명의 경영진—사장과 인적 자원 담당 임원—만 있었다고 했다. 이윤이 늘어나면서 ‘정장차림’의 양복쟁이들이 점점 늘어나 10명을 훨씬 웃돌게 되었다. 그 양복쟁이들은 모두 복잡한 직함을 갖고 있었지만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단지 노동자들을 노려보면서 작업 통로를 돌아다니고, 노동자들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을 세우며, 계획서와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더니 마침내 그 양복쟁이들은 공장 전체의 해외이전을 고안해 낸 것이다." (p.72)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김영배 옮김/메디치미디어/360쪽/1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