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대한민국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면, 윤동주의 시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28세에 일본 감옥에서 요절한 시인, 단 한 권의 유고시집으로 영원히 기억될 시인.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시가 아닌 탓에, 그의 시는 격정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저 어두운 시대를 사는 청년의 반성과 괴로움이 넘처 흐를 뿐이다.
일제가 민족 말살 정책을 폈던 1930년대와 1940년대, 수많은 문인들은 펜을 놓았다. 또 다른 이들은 일제를 위해 펜을 들었다. '끝까지 우리말로 시를 쓴다'는 선택지가 없다시피 했던 까닭은 변절한 어떤 시인의 말처럼 '식민 통치가 계속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윤동주는 저명한 시인이 아닌 학생에 불과했지만 그의 생각처럼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지 않았다. 우리말을 잃어버린 시대,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에 대한 참회록을 우리말로 써내려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그는 끝내 독립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청년 시인이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는 제목 그대로 윤동주 시인의 청춘 시절을 그린 영화다. 흑백으로 흘러가는 풍경 속, 우리가 시로만 접했던 윤동주와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송몽규가 살아 숨쉬고 움직인다. 비록 총천연색은 아니지만 그들의 청춘은 충분히 반짝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빛바란 삽화처럼 쓸쓸하다. 담담한 색채로 무겁게 속을 파고드는 모양새가 윤동주의 시와 꼭 닮았다.
윤동주에게는 평생을 함께 한 친우이자 친척, 송몽규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다. 윤동주가 시대를 고민하고 아파할수록 시로 파고들었다면 뜨거운 가슴을 지닌 송몽규는 직접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도, 끝까지 서로를 놓지 않는다.
배우 강하늘과 박정민은 모자라지도 치우치지도 않는 연기를 관객들 앞에 내놓는다. 스스로를 죽이고 신중하게 윤동주와 송몽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영화가 상영되는 110분만큼은 이들에게서 우리가 알던 배우 강하늘, 박정민의 모습을 찾아 보기 힘들다. 잔잔하게 흐르는 강하늘의 시 내레이션은 두 사람의 연기와 포개지면서 장면에 깊이를 더한다.
'시'를 떼어놓고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을 보자. 사실 그들은 당대에 사랑받던 시인도, 역사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긴 독립운동가도 아니었다. 일본으로 유학 갔다가 경찰에 붙잡혀 광복을 몇 개월 남겨두고 옥사한 불행한 학생들일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들의 삶이 '실패'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그들이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닌, 과정에 집중한다. 청춘이기 때문에 때로는 무모했고, 그만큼 찬란하게 빛났던 순간들 하나 하나를.
두 사람은 감옥에서 실험체로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영화 속 이들이 '대단한 위인'이 아니라서 죽음은 더욱 실감나는 아픔이다. 우리는 윤동주와 송몽규처럼 독립을 꿈꿨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청년들이 이렇게 죽어나갔음을 깨닫게 된다.
윤동주의 시가 '계몽시'가 아니었듯이, '동주' 역시 애국심 고취 영화는 아니다. 영화 속에는 일본과 조선의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주의에 물든 일본인이 있는가하면, 일제의 만행을 비판하는 일본인들도 있다. 영화는 이들 모두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가 얼마나 어리석고 잔혹한 비극이었는지 드러낸다. 심지어 윤동주와 송몽규를 신문하며 윽박지르는 고등 형사조차도 제국주의에 이용당하는 희생양일 뿐이다.
'윤동주의 시'만 알고, 윤동주를 몰랐던 우리들에게 청년 윤동주, 그리고 그의 친우 송몽규를 직면할 시간이 왔다. 오는 17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