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탕, 타다당'…총탄에 맞은 사람들이 하나둘 고꾸라졌다 |
국군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 주민들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 인민군에 협조했던 주민들은 두려움으로, 인민군에 가족을 잃은 주민들은 복수심으로 저마다 떨고 있었다. 1950년 10월 8일. 해군함정이 충남 서산군 근흥면 마을 앞바다에 닿았다.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했을 때 총살될 뻔하다 가까스로 도망쳤던 근흥면 치안대장 최 씨도 함정에 타고 있었다. 인민군에 부역했던 근흥면 자위대장 김 씨 등은 해군에 총부리를 겨누고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교전 끝에 체포돼 얼굴에 총탄 6발을 맞고 사살됐다. 군은 곧장 안흥지서로 향했다. 최 씨가 마을 주민 37명을 붙잡아놓고 한창 흑백 분류작업을 하고 있는데, 함장이 뒤에 서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흑백 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전부 일어서" 함장의 호령에 주민들이 안흥항 바위로 끌려나갔다. 탕탕, 타다당. 총탄에 맞은 사람들이 하나둘 고꾸라졌다. 막동이네 3형제도 이때 죽었다. 닻줄 매는 곳에 올려진 막동이는 총성과 함께 한바퀴 뺑 돌더니 절벽으로 툭 떨어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사람들의 목숨은 등급에 따라 갈렸다. A등급은 처형, B등급은 재분류 후 처형, C등급은 훈방이었다. 분류 업무는 경찰과 치안대, 면장, 동네 이장들이 맡았다. 대부분 인민군 점령기 때 좌익세력으로부터 보복을 당해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경찰이 후퇴하면서 좌익 성향의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 살해하고, 그 유족들은 인민군 점령기 때 우익세력에게 앙갚음을 했으니 모두가 비운한 운명을 타고난 셈이었다.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많은 목숨들이 기구하게 죽었다. 근흥면 주민 윤 씨는 군인과 경찰 환영식에 참석했다가 붙잡혀 죽고, 원북면 이 씨는 부역 혐의자가 처형되는 장면을 구경한 것이 부역 혐의로 몰려 경찰에 목숨을 잃었다. 소원면 문 씨는 인민군을 가장한 경찰을 환영했다는 이유로, 소원면 정 씨는 아들이 좌익으로 죽고 아버지가 우익으로 죽은 데 이어 자신의 생명마저 경찰의 손에서 끝나고 말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삼촌이 한날한시에 죽었는데, 일가족이 한꺼번에 몰살 당하는 건 이맘 때 서산·태안에서는 흔한 풍경이었다. 사지 멀쩡한 시신이나마 수습할 수 있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수십 구의 시신이 골짜기마다, 땅 구덩이마다 넘쳐났다. 사람들은 행여나 곡소리가 터져나올까봐 꾹꾹 눌러담았다. 주민들의 숫자는 하나둘 줄어가는데 수법은 갈수록 교묘하고 치밀해졌다. 민간인 한 명이 밧줄을 풀고 도망간 다음부터는 기관총으로 갈기는 대신 한 사람씩 정조준해서 쓰러뜨렸다. 경찰들 눈앞에서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땅 구덩이 안으로 남자, 여자, 10대의 시신들이 겹쳐졌다. 저녁마다 방공호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는 '딱딱'거리는 게 마치 돗자리를 터는 듯했다. 최후의 순간에도 몰살은 일어났다. 국군이 중공군에 밀려 후퇴한 51년 1월 4일 경찰은 트럭에 민간인들을 태워 이동하다가 한 시간 동안 총살극을 벌였다. |
지난 2008년 과거사위원회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4 후퇴 전까지 충남 서산·태안에서 부역 혐의로 몰려 처형된 민간인이 최소한 1865명으로 조사됐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 소원면 정 씨 등 망자의 유족 770명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일부 승소했습니다.
서울고법 민사33부(이경춘 부장판사)는 "국가는 희생자에게 8000만원, 배우자에 4000만원, 부모·자녀에 800만원, 형제·자매에 400만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고 27일 밝혔습니다.
재판부는 "경찰 등이 정당한 사유 없이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민간인 희생자를 살해해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 생명권, 적법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어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해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이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당했을 것"이라며 "국가는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