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이겨내기보다는 참고 견디기 위해 글을 쓰는 작가, 노르웨이의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40년 삶을 모두 담아낸 그의 자화상 같은 소설은 노르웨이서 대성공을 거두며 '크나우스고르하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이 말은 크게는 <나의 투쟁>을 읽었다는 뜻이며 작게는 '어떤 일을 너무도 세세하게 기억한다'는 뜻이다. 이 작품은 전 세계 32개국에서 연이어 출간되었다.전 세계가 한 남자의 고백에 열광하는 이례적인 현상,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나의 투쟁> 제 1권은 죽음에 대한 저자의 시적이고 산문적인 성찰로 시작한다.
"심장의 삶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힘이 다할 때까지 움직이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다 멈추어버리면 되니까." -9쪽
지금껏 죽음의 민낯을 회피했던 우리가 죽음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라는 바로 이 물음에서부터 크나우스고르는 기억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 해 동안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 모든 것을 시도했지만 어떤 것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완전히 다르게 쓰기 시작했다. 일종의 고백문처럼. 나는 모든 비밀을 말했다." 그렇게 '일상'은 새로운 위치를 점하게 된다. 죽음의 의미가 가장 폭발할 법한 지점인데도 극한의 밀도를 지닌'일상'을 묘사할 뿐이다. 이 책에서 '일상'은 모든 서사를 압도하고 흡수한다. 그렇게 죽음은 유예되고, 유예되는 만큼 의미는 창조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을 때 새로운 '리얼'이 탄생한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새로운 '리얼'의 중독성이다. 이 책의 중독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크나우스고르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초점은 온전히 나의 이야기의 진실에 도달하는 데 있다. 객관적인 의미에서 진실이 아니라 기억하는 방식에서." 그래서 "내 글은 순진한 문장으로 가득차 있다." 결국 <나의 투쟁>의 중독성은 진실함에 있다는 설명이다. 수줍게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진실함.
왜 크나우스고르는 기억하기를 멈추지 않을까? 여기에는 작가만의 독특한 성찰이 담겨 있다. 제1권 곳곳에서 작가는 '지식'과 '의미'의 차이를 설명한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과 마음으로 겪어내는 것이 같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상식'을 극단적으로 말하면 숨을 쉬는 행위조차 의지를 지니고 몸소 해내야만 한다. 우리는 이를 '실존'이라 부른다.
"의미에는 충만함이 필요하고, 충만함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시간에는 저항이 필요하다. 지식은 사물과 현상과의 간격이고, 정체적 상태이며, 의미의 적이다." - 21쪽
크나우스고르의 실존은 현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그간 습관적으로 흘려보낸 일상을 하나하나 반추한다. 이건 추적이 아니다.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진 이유를 알아내는 건 중요하지 않다. 당시를 복기하며 다시 살아낼 뿐이다. 기억을 통해 비로소 온전하게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흘러간 일상을 기억하는 것은 살기 위한 '투쟁'이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한길사/ 680쪽 /14,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