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기간 책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읽은 글 중 하나가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의 짧은 에세이 <손오공, 시저, 그리고 루시>(문학사상 1월호)였다. 인간이 원숭이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하는 글이었는데, 원숭이를 빗대 교훈을 삼는 것이 참으로 교만한 일이었음을 고백하게 만든다.
<서유기> 의 ‘손오공’은 평범한 원숭이로 태어났지만 하늘 복숭아를 훔쳐 먹고 영생불멸의 몸으로 변신해 ‘제천대성’이라는 신적 지위를 얻는다. 말썽을 피우고 변덕을 부리지만 결국에는 불법을 전하는 성스러운 여정의 수호자가 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손오공은 비록 원숭이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 능력은 신의 경지에 달하고, 그 성격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승화한다. 동양의 고전이 된 <서유기>는 문학적으로 창조된 손오공이라는 인물의 모습과 행동과 생각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 작품이다.
‘시저’는 영화 <혹성탈출>의 주인공이다. 유인원의 지도자인 시저는 인간들의 과도한 실험 결과로 탄생한 인물. 인간 이상의 지능을 얻고 언어능력까지 갖추더니 결국 유인원과 인간의 모든 능력을 동시에 겸비한 막강한 존재로 탄생한다. 그 결과 지구를 지배하는 최초의 유인원이 된다. 유인원인 시저를 실험했던 인간들이 거꾸로 시저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혹성탈출>의 시저 역시 인간의 욕망과 교만 그리고 과학이 초래한 불운한 종말과 한계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어리석음을 반성하도록 한다.
김봉렬 총장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손오공과 시저는 원숭이들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손오공을 통해서는 ‘인간이 갖고 있는 동물적 잔인함과 무모함을 버리고 관용과 지혜의 미덕을 갖추라’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시저를 통해서는 ‘인간임을 자부하는 과학적 이성과 문명의 합리성이 결국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류의 파멸을 초래’하리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말한다. 인간들은 그런 줄도 모른 채 원숭이를 의인화시켜 이웃과 상대방 혹은 적을 조롱하고, 폭력을 가하기까지 한다.
집권 후반기마저도 위안부 문제로 막힐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에 역사와 진실을 외면하면서까지 실리와 명분 찾기에만 급급한 청와대도 그렇다. 선거구 획정이 헌법이 정한 시한을 넘어갔는데도 서로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상대 탓으로만 돌리는 국회 역시 그렇다. 당리당략 때문에 합종연횡 이합집산 하는 야당도 역시나다. 불륜을 합리화하려는 재벌 총수의 공개 로맨스라고 다를까. 이런저런 이유를 방패삼아 유치하고, 간사하고, 잔꾀부리고, 뻔뻔스러운 것이 원숭이를 능가한다.
김 총장은 말한다. “유인원과 인류는 결국, 동물성과 인간성의 함량에 따라 아슬아슬하게 구별되는 근사한 존재”라고. 그렇지만 우리는 내면에 치명적인 모순이 들어앉아 있는 줄도 모른 채 원숭이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믿는다. 이성적이며 합리적이고, 배신하지 않으며 속이지도 않고,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믿는다. 과연 그럴까. 정말 그럴까.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아보자. "나는 어디에 속할까? 내 안에는 원숭이가 있을까. 인간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