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유병재·최민수·김미화와 함께 기록한 '세월호 1주기 ② 승자 없는 서울시향 사태, 남은 건 언론의 마녀사냥 ③ 네 번 터진 '천만영화'…그 이면의 '양극화' ④ "빼앗긴 '볼 권리' 되찾자"…영화계·국회는 '불구경' (계속) |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로 꼽히는 네이버의 검색창에서, 16일 현재 스크린 독과점 관련 뉴스를 '상세검색'(정확히 '스크린 독과점'이라는 두 단어의 조합을 사용한 기사만 검색)해 '최신순'으로 나열하면 모두 1736건의 기사가 뜬다. 가장 오래된 기사는 지난 2003년 쓰인 것이다. 13년에 걸쳐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언론에서 다뤄져 온 셈이다.
기사 건수를 연도별로 구분하면 올해 338건, 지난해 271건, 2013년 395건, 2012년 190건, 2011년 139건, 2010년 8건, 2009년 124건, 2008년 72건, 2007년 114건, 2006년 82건, 2005년 1건, 2004년 1건, 2003년 1건으로 분포돼 있다.
최근 5년 동안 스크린 독과점을 다룬 기사는 1333건으로 전체의 77%나 된다. 그 범위를 최근 3년으로 좁혀도 1004건으로 58%에 달한다. 기사는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에서, 이 수치는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는 방증으로 읽을 수 있다.
스크린 독과점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영화산업의 수직계열화다. 거대 자본을 지닌 대기업이 영화의 투자·배급부터 상영까지 장악한 데 따른 불합리.
영화진흥위원회의 '2014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영화 상영작은 모두 247편이다. 이 가운데 5대 배급사로 꼽히는 CJ E&M·롯데엔터테인먼트·쇼박스·NEW·CGV아트하우스가 전체의 24.1%인 59.5편을 배급했는데, 매출액은 전체의 86.5%에 달했다. 나머지 중소배급사 80곳은 187.5편(75.9%)을 배급해 고작 전체 매출액의 13.5%를 나눠가진 셈이 됐다.
5대 배급사 가운데 CJ와 롯데는 극장도 갖고 있다. 스크린 수로 따지면 CJ CGV가 948곳(41.6%), 롯데시네마가 698곳(30.6%)으로 전체 스크린 2281곳 중 72.2%를 점유하고 있다. 이 두 곳에 메가박스를 포함해 3대 멀티플렉스로 부르는데, 그 스크린 점유율은 92%로 사실상 국내 극장사업을 독점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익명을 요구한 영화계 관계자는 "스크린 독과점은 대기업 배급사·극장이 특정 영화를 밀어 줌으로써,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관객은 선택권을 빼앗기는 잔인한 문제"라며 "이에 대한 규제는 영화인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고, 영화에 대한 모든 판단을 관객에게 맞기는 최소한의 저지선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크린 독과점을 규제하자"는 목소리는 올해 내내 이어졌다. 올 초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개훔방)이 대작에 밀려 제대로 된 상영관을 잡지 못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은 분노했고, "먼 곳에 있는 극장을 찾아가서라도 개훔방을 보겠다"며 행동에 나섰다. 유력 정치인도 이에 발맞춰 개훔방 상영회를 열었다.
참여연대, 민변 민생경제위원회(이하 민변), 청년유니온은 '시민의 힘으로 영화관을 확 바꿉시다!' 캠페인을 통해 시민들의 의견을 듣고, 멀티플렉스 본사를 항의방문하는 등 지금도 여론을 모으고 있다. CBS노컷뉴스도 올 초 '한국영화 안녕한가요'라는 주제로 14회에 걸쳐 스크린 독과점 문제를 꼬집는 연속 보도를 내보냈다.
◇ 시민들 규제 요구 봇물…"이번엔 바꿔보자" 공감대에 찬물
하지만 정작 영화계와 정치권은 움직이지 않았다. 영화계는 "국회가 입법화에 적극적이지 않다", 국회는 "영화계 내부의 의견이 모아지지 않는다"며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모양새다.
참여연대 안진걸 협동사무처장은 "스크린 독과점 규제와 관련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 개정안이 국회에 십수 개 제출돼 있는데, 이 정도면 사실 벌써 통과되고도 남았어야 한다"며 "스크린 독과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원들이 다들 인정하면서도 무엇 때문인지 소극적"이라고 전했다.
이어 "영화계를 접촉해 보면 '센 거든 약한 거든 뭐라도 가능한 법안을 내라'고들 한다"며 "국민들의 이익과 직결된 사안인데다, 영화계의 공정한 발전을 위해서도 한 번쯤은 약한 형태로라도 법제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변 성춘일 변호사는 "영화계 내부의 이해관계가 너무 달라서 한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은데, 그렇다고 한쪽의 입장만 대변할 수도 없는 분위기"라며 "애초에 멀티플렉스를 허용한 이유가 보다 많은 관객들이 보다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던 만큼, 그 취지에 걸맞은 합의점을 찾을 수 있도록 소수 배급사 등이 적극적으로 어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영화계 내부에서는 정부, 영화인, 멀티플렉스 등의 관계자가 참여해 운영 중인 '한국영화동반성장협의회'(이하 협의회)를 통해 스크린 독과점 문제를 해결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이에 대해 한 영화계 관계자는 "강제성이 없는 협의회는 지금까지 문제 해결에 큰 역할을 못해 왔는데, 대기업 배급사·극장 측은 협의회에서 풀어보자 하고, 영화인들은 협의회를 신뢰하지 못하는 면이 있어서 이해관계가 상충된다"며 "협의회가 정부쪽 체면 세워주기 역할에 주력하고 있다는 불신이 큰 만큼, 법제화로 해결하는 것이 적절한 대안이라는 공감대는 높다고 본다"고 전했다.
그는 "다만 현재 영화산업이 워낙 대기업 중심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여서 목소리를 내기가 두려운 입장들이다. 다양한 생각을 어떻게 모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데 우려가 크다"며 "국회 쪽에서는 영화계 내부의 목소리가 모아지지 않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말하는데, 올 초 스크린 독과점 규제에 대한 여론의 힘이 모아졌을 때 밀고 나가지 못한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덧붙였다.
스크린 독과점 규제의 법제화를 위해 영화계와 꾸준히 접촉해 온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영화계 내부적으로 협의회에 큰 기대를 거는 분들이 있는데, 협의회는 말 그대로 협의체일 뿐"이라며 "영화인들이 앞으로 정말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면 대기업의 시혜적인 조치에 의지해서는 어렵다. 강제성을 지닌 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공유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강조했다.
◇ 법제화 논의 지속…합의점 찾으려는 움직임에 '희망'
새정치민주연합 도종환 의원은 현재 '영화관 무단광고 상영 금지' '관객 불만사항에 대해 영진위가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한 조치' '특정영화에 대한 차별 금지' '예술·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을 핵심 내용으로 한 영비법 개정안 발의를 준비 중이다.
도종환 의원실 홍수진 보좌관은 "현재 국회 법제실에 초안 검토를 맡겨둔 상태로, 내년 2월 국회 상임위가 있으니 법제실 검토 뒤 영화계 의견을 듣고 빠르면 올해 안에 발의할 계획"이라며 "복합상영관(멀티플렉스)에 대한 정의를 추가하고, 저예산영화의 상영 횟수·시간대 등을 보장하는 식으로 상영 중인 영화에 대한 차별이 없도록 하는, 공정한 스크린 배정에 방점을 뒀다"고 전했다.
'스크린 독과점 규제를 위한 첫발이라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홍 보좌관은 "현재로서는 가장 나아간 법안이라 해도 무방하다는 점에서 그렇다"며 "법안을 발의할 때는 통과되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에 내용을 제대로 담아내 통과시키도록 애쓰겠다"고 강조했다.
참여연대 안진걸 처장은 "도종환 의원의 영비법 개정안은 특정영화에 대한 상영 점유율을 제한해 수직계열화를 완화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다양한 영화가 보다 공정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스크린 독과점 규제의 첫발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스크린 독과점을 보다 강도 높게 규제할 수 있는 법안도 꾸준히 논의 중이다. 박경신 교수는 '영화상영업자가 영화배급업을 겸하는 경우, 그 영화상영업자의 전국 상영관 점유율과 한국영화 배급시장 점유율을 합한 수치가 100분의 50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합산점유율 규제' 방식의 영비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이는 두 업체가 담합하더라도 상영시장 점유율과 한국영화 배급시장 점유율을 합해 100%가 나오지 않도록 각 업체의 합산점유율을 50%로 한정한 것이다. 예를 들어 배급과 상영을 겸하는 업체가 스크린을 25% 점유하고 있다면, 당해 이 업체의 한국영화 배급은 25%를 넘지 못한다. 25%가 되는 시점에서는 배급권을 다른 배급사에 넘기거나 배급을 중단해야 하는 것이다.
박 교수는 "현재 영화계 내부에서는 합산점유율로 독과점을 제한하는 방식과 배급·상영의 겸업을 완전 금지하는 안을 두고 논의 중"이라며 "저는 위헌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배급·상영 겸업 완전 금지가 위헌이라는 논리도 있는 만큼, 합산점유율 방식을 채택하면 실질적인 강제력을 가지면서도 위헌 문제는 사라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결국 대기업 비계열사인 제작사·배급사들이 마음 놓고 영화를 제작·배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법안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며 "영화계가 문화산업의 총화로서 상징적이긴 하지만, 여타 산업과 비교했을 때 매출 자체가 그리 크지 않다. 따라서 영화계 전체가 지지하는 합의안이 나와야만 법안 통과도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CGV·롯데시네마 두 업체가 전국 스크린의 70%를 점유하고 있고, 한국영화의 40~50%를 스스로 또는 계열사를 통해 투자·배급하고 있는 경우는 어느 산업과 비교해도 매우 이례적인 구조"라며 "영화계 내부에도 이를 바꿔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 돼 있는 만큼, 당사자들이 보다 단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앞서 언급한 영화계 관계자는 현재 한국 영화산업의 부조리한 흐름이 이어지면 결국 '모두가 지는 게임'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스크린 독과점 규제에 대한 공감대를 여야 정치권으로 구분지을 문제는 아니지만, 야당 의원들조차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스크린 독과점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면 한국영화에 투입되는 자본이 정부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권의 입맛에 맞는 영화, 곧 관객이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니라 정권이 '보여 주고 싶은 영화'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했으면 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지금 상태로 가면 결국 소수의 영화만 살아남아 영화를 만드는 아티스트는 사라지고 '영화 공장'만 남게 될 것"이라며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화계를 떠나게 되더라도 영화 만드는 기술은 발전할 수 있겠지만, 창조적인 감성의 부재로 작품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영화인 스스로 생존을 위해서라도 절박하게 고민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