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접전의 진원지는 부천 KEB하나은행이다. 하나은행은 2013-14시즌 꼴찌 등 최근 몇 시즌 동안 하위권을 전전했지만 올 시즌은 다르다. 2일 현재 'KDB생명 2015-2016 여자프로농구'에서 당당히 2위를 달린다.
전통의 강호 인천 신한은행과 5승4패로 어깨를 나란히 하며 1위 우리은행(7승2패)을 2경기 차로 쫓고 있다. 하나은행이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PO) 준우승팀 청주 KB국민은행(5승5패)과 명가 재건을 노리는 용인 삼성생명(4승5패)에 앞서 있는 것은 근래 보기 드문 일이다.
하나은행 선전의 중심에는 첼시 리(26 · 189cm)가 자리잡고 있다. 해외동포 선수 자격으로 입단한 리는 100kg 안팎의 육중한 체구와 골밑 실력으로 코트에 '검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피부 색과 덩치만 보면 외국 선수나 다름없어 다른 팀들의 경계와 질시를 동시에 받고 있다. 그러나 몸 속에는 뜨거운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리를 최근 서울 청운동 하나은행 체육관에서 만나 솔직한 속내를 들어봤다.
▲"의심은 해도 내 피를 바꿀 수는 없어요"
리는 현재 평균 33분19초를 뛰며 15.1점 11.1리바운드로 더블더블 활약을 펼치고 있다. 득점 전체 5위에 리바운드는 당당히 1위를 달린다. 뿐만 아니라 블록슛도 2위(1.8개), 가로채기도 10위(1.4개)다. WKBL이 정한 팀 공헌도가 전체 6개 구단 선수 중 1위다.
이 정도면 가히 '용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활약으로 리는 올 시즌 1라운드 MVP에도 뽑혔다. 리는 "스페인과 루마니아 리그에서도 주간 MVP를 받은 적이 있다"고 귀띔하면서 "한국 무대 첫 시즌에 수상해 영광스럽고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겸손한 소감을 밝혔다.
이런 활약에 하나은행은 시즌 개막 후 상위권을 달릴 수 있었다. 하나은행이 지난 시즌 신인왕이자 얼짱 가드 신지현의 시즌 아웃, 샤데 휴스턴과 김정은의 부상 공백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알려진 대로 리는 한국계다. 할머니가 고(故) 이현숙 여사다. 이 여사는 주한 미군 군무원이던 리의 할아버지를 만났고, 한국에서 리의 아버지 제시 리를 낳았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손녀를 보지 못한 채 운명했다. 부모 역시 일찍 사망하는 불운에 리는 4살 무렵 입양됐다.
이런 사실은 본인도 2년 전에야 알게 됐다. 해외 리그 진출을 위해 여권을 발급받다가 할머니가 한국인임을 안 것이다. 리의 에이전트는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에 부모 또는 조부모가 한국 사람일 경우 '해외동포 선수' 자격을 부여해 국내 선수처럼 뛸 수 있는 규정을 알았고, 결국 리의 고국 무대 진출이 성사됐다. 남자 프로농구의 문태종(고양 오리온), 문태영(서울 삼성) 등 혼혈 선수가 하프 코리안이라면 리는 쿼터 코리안인 셈이다.
하지만 워낙 피부색이 진하고, 할머니 이 여사가 작고한 상황이라 의혹이 적지 않았다. '정말 한국계가 맞느냐'는 노골적인 시선이 끊이지 않았다. 더욱이 리가 맹활약하면서 질시어린 눈총도 받았다.
정작 본인은 이에 대해 초연하다. 피부가 검은 만큼 붉은 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리는 "비록 겉모습은 한국인과 많이 달라 의심을 받을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내 몸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 분명하고 그건 어떻게 바꿀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할머니가 한국인인 것은 서류상으로 증명이 됐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내 뿌리 韓에서 오래 살고 싶어"
먹는 것부터 힘들다. 리는 "국이나 스프 등은 1인분씩 접시도 따로 먹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다인분을 한꺼번에 시켜서 나눠 먹는다"면서 "신기하지만 낯설다"고 털어놨다. 구단 통역은 "그래도 양념 갈비는 정말 잘 먹는다"고 귀띔하면서 "그나마 휴스턴이 오래 WKBL에서 뛰어 잘 이끌어준다"고 말했다.
합숙 문화도 어색한 것이 사실이다. 리는 "특정 행동에 반응하는 게 완전 다르다"면서 "적응해야 하고 남들도 빨리 하기를 바라는데 그 부분이 많이 힘들다"고 말했다. 구단 관계자는 "정말 적응이 어렵다면 다음 시즌에는 따로 숙소를 구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농구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리그에 비해 경기수가 많고 경기 템포가 빠른 한국 무대다. 리는 "스케줄이 빡빡하고 페이스가 빨라 힘들다"면서 "뛰지 않고 하는 한다면 무조건 할 텐데…"라고 푸념하기도 했다.
단순히 예전에 몸담았던 리그와는 분명히 다르다. 리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뛰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서 "문화와 언어를 배워야겠지만 충분히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 농구 선수인 남자 친구와 함께 한국에서 뛰면 되지 않느냐는 말에 리는 "결혼하면 함께 뛸 수 있겠지만 모르겠다"면서 "아쉽지만 그렇게 되려면 다른 한국인 남자를 찾아야 할 것 같다"고 웃었다.
하지만 특별 귀화 및 태극마크 등에 대해서는 신중하다. 당초 리는 그동안 몇 차례 인터뷰에서 귀화와 국가대표 출전에 대한 뜻을 드러냈다. 그러나 최근 한국계 진위 논란에 시달려서인지 이번 인터뷰에서는 "물론 영광스럽게 생각하지만 아직 미래의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것보다 "소속팀을 플레이오프, 챔피언결정전에 끌어올리는 게 목표"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역시 한국 문화에 적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는 "현재 우리 팀이 어려운 상황임을 알고 질 수 있다는 것도 여실히 드러났다"고 진단했다. 일단 한국 문화와 소속팀의 현실을 깨닫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겠다는 리다. 무턱댄 공수표 남발보다 가능성과 실체를 깨닫고 현실적으로 한국에 적응하고 있는 한국계 첼시 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