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전 대통령은 "군 장성들을 언제 바꿀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고 "대통령이 통수권을 행사한다면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답변이 나오기 무섭게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그날 바로 교체한다고 선언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군 수뇌부에 대한 인사가 실시돼 불과 몇 시간 뒤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은 전격 전역조치됐다. 그 자리에 비(非)하나회 출신인 김동진 연합사 부사령관과 김도윤 기무사 참모장이 임명됐다.
12.12 군사쿠데타의 주역이자 전두환·노태우 정권 당시 군을 좌지우지하며 핵심 요직을 독점했던 하나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시작된 순간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광석화 같은 조치가 있은 바로 다음날 김 전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니들도 많이 놀랐제?"라며 배포를 과시했다.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 경질 이후에도 수도방위사령관과 특전사령관, 각군 사령관은 물론 수도권 인근 사단장까지 하나회와 연결된 군 수뇌부를 교체하는 작업이 4월 한달동안 진행됐다.
다음달 10일 군 당국은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명단에 이름이 오른 142명 가운데 105명이 실제 하나회 회원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이후 5년동안 진급과 보직에서 철저히 불이익을 받았고 이로써 장성은 물론 영관급 장교까지 하나회 회원은 더이상 군에 발붙일 수 없게 됐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첫 개혁작업이었던 하나회 숙청은 군부에 남아있는 쿠데타 잔존세력을 척결함으로써 더이상 군사 쿠데타가 발생할 수 없도록 그 싹을 자른 일대 사건이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3년 군부의 상황을 살펴보면 12.12군사쿠데타가 발생한 1979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87년 6.10 민주화항쟁으로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급격하게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여전히 하나회가 장악하고 있었던 것.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이 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쿠데타 예방·진압 시스템을 이중삼중으로 만들어 놨다.
하지만 이 시스템의 일원으로 군부의 위협요인을 찾아 제거하는 임무를 맡았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현 기무사령관)이 쿠데타를 주도했고, 쿠데타 발생시 진압해야할 수방사와 특전사가 오히려 쿠데타의 행동대장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같이 예방·진압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쿠데타가 가능했던 이유는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통해 군 수뇌부가 탄탄하게 결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1993년 군부 역시 하나회가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 특전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1·2·3군 사령관, 수도권 사단장 등 주요보직을 장악하며 언제든 쿠데타가 가능한 인적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군 정보당국의 한 관계자는 "역대 정권에서 기무사령관이나 특전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을 임명하는 이유는 12.12처럼 군사쿠데타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와 동시에 3당 합당을 통해 신군부 세력이 여당인 민주자유당 내부에 상당수 포진됐다는 점도 김 전 대통령이 하나회 척결을 서두른 이유 가운데 하나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뒤인 1999년 8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하나회 정리는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했다며 "이걸 안 했으면 문민정부도 없고 김대중 정부도 없었다. 쿠데타했을 게 뻔한데…"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하나회 척결 이후 소통령으로 불렸던 차남 현철 씨가 군 인사를 좌지우지하면서 새로운 사조직이 생겨나고 이것이 부정부패로 이어진 것은 오점으로 남았다.
군 사법당국에 오래 종사한 한 관계자는 "하나회는 척결됐을지 모르지만 이를 대체하는 사조직들이 계속 진화하면서 지금의 방산비리의 원흉이 되고 있다"면서 "하나회 척결로 대표되는 군 개혁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