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필생의 라이벌' DJ 곁으로

한국 현대정치사의 양대 거목…민주화 동지에서 정치 경쟁자로 애증의 40년

거산(巨山)과 후광(後廣)

22일 서거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일생을 반추할 때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두 사람은 3김(金)시대의 두 축으로서 민주화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대한민국 현대정치사의 거목들이었다. 군사독재정권과 싸워온 민주화 운동의 동지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국회 입성은 YS가 훨씬 빨랐다. DJ(1926년생)보다 한 살 어린 YS는 서울대 철학과 3학년 재학 시절인 1950년 장택상 전 국회부의장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고향 경남 거제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26세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YS는 그해 11월 이승만 정권이 3선 개헌을 추진하자 자유당을 탈당하고 1955년 창당된 민주당에 입당했다.

야당 정치인이 된 YS는 1958년 4대 총선에서 낙선하지만 4·19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치러진 5대 총선에서 당선돼 국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DJ도 같은 당 의원으로 정치권에 등장했다.

정치 선배인 YS는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DJ에게 승리하면서 앞서갔지만,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나선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1차 투표에서 승리하고도 결선투표에서 DJ에게 역전패했다. YS는 1971년 대선에서 DJ를 도와 “김대중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라고 지원유세에 나서지만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95만표 차로 패배했다.

YS는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선포 이후 1974년 신민당 총재에 당선되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투쟁을 이끌었고 1979년 10월에는 뉴욕타임스를 통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 철회를 요구해 '의원직 제명'을 당하고 가택에 연금됐다.

1979년 박 전 대통령이 피살되는 10·26 사태가 발생하면서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오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12.12 쿠데타가 일어나고 YS는 그해 5월 다시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는 1981년 5월 가택연금에서 플려나자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산악회'를 출범시키고 1983년 5월18일에는 민주화 5개항 수용과 야당인사 석방을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1970년 대선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떠오른 DJ 역시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돼 수장(水葬)될 뻔하는 등 숱한 고초를 겪었다. 1980년 5월 17일 밤에는 신군부에 의해 체포돼 5.18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됐고 이로인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국제사회의 압박에 힘입어 감형되고 1982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출소했다.

YS와 DJ는 1984년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고 1985년 2월 총선에서 신민당의 승리를 일궈냈다. 양김(兩金)은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며 6월 민주항쟁을 이끌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냈다.

민주화를 함께 달성한 YS와 DJ는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둘간의 대선후보 단일화 협상은 실패하고 DJ는 탈당한 뒤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결국 양김은 국민의 여망을 무시하고 모두 대선에 출마했고 YS(28%). DJ(27%) 모두 노태우 후보(36.6%)에게 뒤져 민주정부를 탄생시키는 데 실패한다. YS는 DJ의 탈당을 “천추의 한”이라고 했고 DJ는 “내가 후보직을 사퇴하는 게 옳았다”고 술회했다.

YS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발탁했던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DJ에게 패배하면 제1야당의 자리를 평민당에 넘겨줬다. 이후 YS는 1990년 여소야대의 정치지형을 활용하기 위한 이른바 ‘구국의 결단’을 결행했다. 바로 여당인 민정당과 자신의 민주당. JP(김종필 총재)의 공화당을 합치는 ‘3당 합당’이다. YS는 1992년 민주자유당 대선후보로 선출되며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았고 대선에서 DJ를 누르며 14대 대통령으로서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역사적인 문민정부를 출범시키는 주인공이 됐다.

DJ는 대선 패배와 함께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1995년 정계에 복귀하고 1997년 대선에서는 JP와의 DJP 공조를 통해 기어코 승리해 YS의 후임인 1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87년 이후 갈라선 양김의 관계는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다. YS는 노 전 대통령 서거를 놓고 이명박 정부를 '독재'라고 비난하는 DJ에게 "이제 그 입을 닫으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2009년 8월 DJ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YS가 병문안을 하면서 극적 화해를 하게 됐다.

그리고 YS도 3김 중 JP만 남겨놓고 22일 영면(永眠)에 들었다. 그들이 쥐락펴락했던 격동의 시절도 저물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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