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결혼 한 달 전, 부모님 댁에 내려가던 중 휴게소에 들른 문호(이선균)와 선영(김민희). 커피를 사러 간 사이 선영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돌연 사라진다. 문호는 미친 듯이 선영을 찾아 헤맨다. 그녀의 집에 가보니 급하게 치운 흔적이 역력하다. 다니던 회사의 이력서는 가짜였다. 선영이 개인파산을 했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그런데 정작 서류에 남은 그녀의 필적과 사진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지문도 없는, 문호가 사랑했던 선영은 누구인가.
위의 두 이야기는 몹시 닮아 있다. 앞의 것은 지난 20일 언론에 보도된 사건이고, 나머지는 영화 '화차'(감독 변영주)의 줄거리다. 영화보다 더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 셈이다.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지난 2012년 개봉 당시 24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평단과 관객 모두의 호평을 얻었다.
영화와 소설은 모두 신용카드, 소비자금융 등 거대 자본에 잠식 당한 현대 소비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크고 작은 욕망을 좇다가 예기치 못한 비극에 휘말리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작품은 낙오된 그들을 어둠으로 삼켜버리는 비정한 도시의 현실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길어 올렸다.
소설 속 거품경제가 붕괴한 직후인 1990년대 초의 일본 사회상, 그리고 영화 속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2000년대 말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자본에 예속된 한국 사회의 모습은 큰 오차 없이 겹쳐진다.
작품 속 여자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어쩌다 이렇게 많은 빚을 지게 됐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난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뿐인데…"
제목으로 쓰인 화차(火車)는 생전에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실어나르는 불수레를 뜻한다. 정글 같은 경쟁 사회를 살면서 불행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을 만큼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불행이 닥치지 않을까 조바심 내며 살아가는 우리, 이미 화차를 탄 채 질주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이름, 나이, 가족관계까지 모두 타인의 것을 훔쳐 거짓 인생을 살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이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준 화차의 여주인공은 엄연한 범죄자다.
그럼에도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다면 왜일까. 그녀를 범죄자로 만든 것은 거대한 악의가 아니라, 물질만능주의로 점철된 현대 사회가 평범한 인간에게 강권하는 나약한 욕망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목숨 걸고 몇 번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다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 (중략)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예요." (소설 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