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저녁 노사정 대타협안이 전격 통과되자 박 대통령이 밤중에 참모진에게 펀드 조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갑자기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뇌 끝에 얻어진 산물이기 보다는 즉흥적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현재 펀드 조성과 활용 방안에 대해서는 별도 재단 설립과 함께 민간 자율 등의 내용과 후속 발표 계획이라는 윤곽만 잡아놓은 상태다.
이를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당시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해 벌였던 금모으기 운동의 캠페인성으로 바라보며 고통 분담을 상시 요구한다는 비판의 소리도 없지 않다.
당시 금모으기 운동은 어디까지나 국가부도 위기 극복을 위한 것으로 출발 자체가 민간에서 자발적이고 한시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번 정부 주도 희망펀드는 재벌 총수를 포함한 사회 지도층에 ‘돈을 내라’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강제적’이고 ‘동원성 이벤트’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대통령은 국민 전체를 바라보고 ‘희망이 듬뿍 담긴’ 선물을 던졌지만 누가 봐도 펀드에 돈을 많이 기부해야 할 쪽은 이미 정해진 것 아니냐는 게 공통된 시각이다.
주요 대기업들이 정부 시책에 늘 공통적으로 보여 오던 ‘취지에 공감’ 반응은 이번에도 여전했지만 자발적이기 보다 ‘관제성 펀드’에 가까운 것에 대해 난감해 하는 모습이다.
구체적으로 얼마를 내야 하는가 하는 현실적 문제에 대해서 다들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일단 대통령이 큰 맘 먹고 2천만 원에 월급의 20%까지 쾌척하겠다고 하니 대충 기준이 잡힌 게 아니냐"고 하면서도 계산 빠른 기업들은 내심 주판알을 튕기지만 그리 간단치는 않아 보인다.
한 대그룹 고위 임원은 “펀드가 금융적 부분인데.. 이걸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지..”라고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이 대통령이 던진 펀드 안에 대한 기업들의 곤란한 사정을 대변하고 있는 듯 보였다.
같은 그룹의 또 다른 계열사 관계자는 “아직까지 뚜렷하게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청년채용 등 지금 하고 있는 부분도 엄청 노력하고 있다“며 불만을 에둘러 표현했다.
나아가 “채용 규모 유지도 힘든 상황이지만 청년일자리 창출은 맞는 방향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보조를 맞추려고 한다“ 하면서도 마지못해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빛이 역력했다.
실제 올해 상반기 30대 대기업들은 매출은 물론 영업이익, 순이익 모두 날개없는 추락으로 불황의 깊은 골짜기에 빠져들고 있다.
이같은 시련의 골짜기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며 길게는 향후 3년까지 쓴맛을 봐야 한다는 우울한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광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듯이 기업들 사정이 넉넉하면 얼마든 베풀 여유가 있겠지만 지금은 다들 뼈를 깎는 고통으로 진입해야 하는 시기일 수 있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펀드 제안이 그닥 시의적절하다는 평을 듣기는 힘들 것 같다.
기사 댓글에 비친 민심은 더욱 냉소적이다.
‘일단 긍정 평가’의 의견도 눈에 띄지만 ‘대기업들 마지못해 생색내는 것은 전시행정’, ‘나라가 휘청거리고 갈수록 살기 힘든 지금 뭐 누구를 도울 수 있을까요’, ‘일단 정부가 좋은 정책부터 내놓고 펀드를 ..’
기업들의 곤란한 사정을 대변하는 글도 있다.
‘대통령이 월급의 20% 냈으니 알아서 하세요’ ,‘대통령의 20%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난감’, ‘대기업들이 국영기업은 아닐텐데’
이번 박대통령 펀드에 대해 희망섞인 기대도 물론 적지 않다.
하지만 재단 운운하고 ‘기업들의 적극 협조’를 바라는 게 아니냐는 따가운 시선 속에 마치 방식 자체가 과거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업들에 십시일반을 요구했던 ‘일해재단’의 망령이 자꾸 오버랩돼 뒷맛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