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끗차이' 디테일에 유무죄 갈려…조희연 2심 분석해보니

지난해 교육감 선거 당시 상대 고승덕 후보의 미국 영주권 의혹을 제기해 기소된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4일 서울 서초구 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선고 유예 판결을 받고 밝은 표정으로 나서고 있다. (사진=윤성호 기자)
당선 무효 위기에 처했던 조희연 교육감이 2심 재판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으며 기사회생했다. 고승덕 후보의 영주권 의혹을 처음으로 제기했던 국회 기자회견을 무죄로 판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배심원 전원이 유죄로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무죄를 내린 2심 재판부의 논리는 뭘까?

◇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디테일의 차이에 주목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고승덕 후보에게 자신과 두 자녀의 미 영주권 보유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촉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조희연 캠프가 받은 제보에 따르면…"

2014년 5월 25일 교육감 선거를 9일 앞두고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에서 조 후보가 한 말이다. 주된 내용은 고승덕 후보와 자녀들의 미국 영주권 보유 의혹이 있다는 것이었지만 내내 가정적인 표현을 썼다. 조 후보는 문장마다 "만약 이 제보가 사실이라면" 이라는 전제를 붙였고, 상대측의 해명을 촉구하며 접근했다.

재판부는 이같은 디테일한 표현 방식에 주목했다. '의혹', '제보', '해명요구'등의 가정적, 유보적인 표현이 들어갔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저명한 언어학자 4명에게 의견서를 받아 어조를 분석하기도 했다. 1심이 "'비록~라면'이라는 가정적인 표현을 사용한 경우에도 허위사실이면 선거법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며 유죄로 결론내린 것과는 다르다.


이틀 뒤 라디오 인터뷰에서도 조 교육감이 상대의 해명을 촉구하고 사실이 아니면 피해를 감수하겠다고 강조한 부분도 재판부는 유심히 봤다.

조 교육감은 "만일 아주 객관적인 자료로 입증해 주시면 저도 사과와 경의를 표하고요. 또 그만큼 제가 잘못된 문제제기를 했다는 것 때문에 아마 유권자들이 저에게 마이너스를 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의혹 제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언어학자들은 25일 국회 기자회견문과 26일 답신글, 27일 라디오 인터뷰를 감정한 결과 모두 "의혹을 제기하고 해명을 요구한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고, 재판부도 이에 동의했다. 결국 의혹이 있어도 사실처럼 단정하지 않고 가정적 표현으로 상대측의 해명을 요구했던 디테일한 표현방식이 일부 무죄를 이끌어낸 셈이다.

◇ "~고 합니다" 같은 단정적 표현은 유죄

반면 섬세하지 못했던 표현은 유죄를 받았다. 아래는 2014년 5월 26일 조희연 캠프에서 내보낸 '고승덕 후보님께 드리는 답신'이라는 글의 일부이다.

"저의 캠프에 제보된 다수의 증언에 따르면, 고 후보님께서는 몇 년 전 공천에서 탈락하신 뒤, '상관없습니다. 저는 미국 영주권이 있어서, 미국 가서 살면 됩니다'라고 말씀하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고 후보님의 말씀을 들은 분들 가운데는 고 후보님의 지인들과 언론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분들이 잘못 들은 건 아닐 것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재판부는 고 후보가 지인들에게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는데도 마치 한 것처럼 단정적으로 표현해 허위사실을 공표했다며 이 글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했다. "말씀하고 다니셨다고 합니다"는 표현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단정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 역시 표현의 디테일에 따라 유무죄가 엇갈렸다.

◇ '의견'이냐 '사실'이냐 혹은 이도저도 아니냐

지난해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고승덕 변호사의 미국 영주권 의혹을 제기해 1심에서 당선무효형을 선고 받은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은 뒤 지지자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사진=윤성호 기자)
앞서 1심 재판부가 가장 주목한 것은 조 교육감의 의혹제기가 '의견'이냐 '사실'이냐에 대한 판단이었다. 공직선거법상 '낙선목적 허위사실공표죄'는 말 그대로 '사실'을 공표할 때 성립하는 죄이다.

조 교육감이 "사실의 공표가 아니라 의견 표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1심 재판부는 "증거에 의한 입증이 가능하면 사실이다"며 유죄로 판단했다.

다시말해, 고 후보가 미국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는지 여부를 증거로 입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의혹 제기라고 주장해도 이는 사실의 표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2심의 판단은 달랐다. 2심은 의견이냐 사실이냐에 대한 구분이 칼로 자르듯 명확한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봤다. 증명을 할 수 있으면 사실이고, 증명을 할 수 없으면 의견이라는 이분법은 맞지 않다는 것. 의견과 사실의 영역이 혼합, 공존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그 대신 주목한 것이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다. 기자회견 전날 탐사전문 기자가 관련 의혹을 제기해 트위터에 올리는 등 합리적으로 의심할 정황이 있었고, 조 교육감이 상대 후보의 개인정보에 대해 직접 미국 대사관 등에 확인하기 어려운 처지인 점 등도 감안됐다.

◇ "선거는 토론의 장… 표현의 자유 위축 안돼"

무엇보다 2심 재판부가 우려했던 것은 선거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 위축이었다.

재판부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할 중요 영역은 정치적 토론 내지 공방 과정이고, 가장 활발하게 이루지는 것이 선거국면이다"며 "경쟁후보들 사이의 상호 비판과 공격적인 검증은 선거 과정에서 불가피하다"고 대전제를 깔았다.

그러면서 "공직선거에서 후보자의 적격성 검증은 필요하고 언론의 자유도 보장돼야 한다. 이를 위해 후보자에게 위법이나 부도덕을 의심케 하는 사정이 있을 때에는 문제제기가 허용돼야 하고 쉽게 봉쇄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논리에 따라 재판부는 조 교육감에게 핵심 피의사실에 무죄를 선고하고 일부 유죄에 대해서도 선고유예를 내렸다. 1심에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아 당선 무효로 직을 잃을 뻔한 위기에 몰렸던 조 교육감은 벼랑끝에서 법원의 선처를 받았다.

이처럼 2심 재판에는 사실과 의견에 대한 법적 판단부터, 선거 기간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까지 여러 함의를 담고 있다.

특히 1심이 국민참여재판으로 배심원들 전원이 유죄로 판단해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었음에도 항소심 재판부가 소신에 따른 과감한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 결과를 두고 정치권은 물론 법조계에서도 여러 해석과 평가를 남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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