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겉다르고 속다른 재벌…법망을 조여라

재벌닷컴이 지난 30일 공개한 30대 그룹의 등기임원 현황을 보면 재벌총수 일가들이 임원 보수 규정을 얼마나 악용하고 있는 지 여실히 드러난다.

총수가 있는 30대 그룹에서 총수가 등기 임원으로 등재된 곳은 78개사로 2013년 108개사보다 27.8%나 줄었다. 삼성과 SK, 현대중공업, 한화, 두산, 신세계 등 9개 그룹 총수는 계열사 등기 임원을 한 곳도 맡지 않았다.


이재용 삼성부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이 등기이사에 등재되지 않았고,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지난해 2월 7개 계열사 등기임원에서 사퇴했다. 최근 경영권 분쟁을 겪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도 대홍기획 등 5개 사에서 물러났다.

재벌총수나 오너일가들이 슬그머니 등기임원에서 빠지는 이유는 연봉을 공개하도록 한 ‘자본시장·금융투자업법(자본시장통합법)’ 개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국회는 지난 2013년 상장사 5억원 이상 등기임원에 대해서는 연봉 공개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한 조치였다. 회사의 실적은 후퇴했는데 거액의 보수를 챙겨가는 관행을 감시하기 위해 보수를 공시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자 오너 일가들이 꼼수를 부리기 시작했다. 등기이사만 공개하도록 한 조항을 악용해 미등기이사로 자격을 전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총수가 이사로 등재된 회사는 전체의 10% 안팎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법망을 교묘히 피해 등기이사에서 빠지는 현상은 차라리 법개정 이전보다 못한 결과를 낳는다. 보수 공개도 회피할 뿐더러 경영책임도 안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주식회사의 이사회는 주주총회 소집과 대표이사 선임과 같은 회사 경영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단위다. 등기이사는 이사회에 참여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사를 말한다. 반면 의결권이 없는 미등기이사는 회사가 결정한 사안이 문제가 되더라도 법적인 연대책임을 지지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업문화에서 재벌 총수나 오너 일가들은 등기이사로 등재돼 있지 않더라도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한다. 경영은 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독특하고 기형적인 구조, 이게 바로 비리를 낳고 책임경영을 멀어지게 한다. 경영자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회사나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하더라도 제재할 수 없다.

재벌3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베테랑>이 흥행돌풍을 일으키는 현상은 반대로 생각하면 돈을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재벌들의 횡포에 국민들이 극도의 반감을 보이고 있다는 반증이다.

대기업들은 횡령이나 배임 등 각종 비리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럴 듯한 투명경영 선포식으로 상황을 모면해 왔지만, 연봉공개를 회피하려는 꼼수에서 보듯 겉과 속은 크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오너 일가의 보수공개에 대해서는 이번 기회에 법적인 보완책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 일부 의원들도 다양한 형태로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고 한다. 등기임원이든 미등기임원이든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한다면 오너 일가의 보수는 공시되는 쪽으로 개정하는 게 맞다.

금융위는 재작년 법 개정 당시 ‘재벌그룹 총수 일가가 보수 공개를 회피할 경우 제도를 보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지만 이 말이 무색하게도 그간 오너 일가의 등기이사 탈출러시 속에서도 무사태평이었다.

경제살리기와 투명경영은 결코 상극의 개념이 아니다. 경영이 투명해야 기업이 건전하게 발전한다. 정치권은 입법 보완 작업을 서둘러야 하고 당국은 혹여 경제살리기를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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