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강행군이었다. 서울 삼청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난 15일은 언론과의 인터뷰 마지막 날이었다. 류승룡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영화 개봉 첫 주가 지나고 중간에 인터뷰를 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매번 영화 인터뷰를 할 때마다 일 대 일로 해 왔어요. '7번방의 선물'(2013년 1월 개봉) 이후 2년 반 만에 인터뷰를 했네요. 7번방의 선물이 천만 관객을 동원한 것을 기념하는 파티에서 '다음 인터뷰는 일 대 일로 정성 들여 하겠다'는 약속을 했었죠. 이번에 강행군을 한 건 스스로 그 약속을 지키자는 의미가 컸어요."
류승룡은 손님을 통해 관객을 만나고 있는 지금 "기분 좋고 설레는 긴장 같은 것이 있다"고 전했다.
"제가 맡은 떠돌이 악사 우룡은 비밀을 간직한 마을로 들어간 이방인이잖아요. 죄를 감추려 드는 마을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우룡을 경계하죠. 우룡이 평범한 덕에 마음대로 헤집고 다녀도 되는 측면이 있었던 셈이죠. 이 점에서 오히려 더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지점이 있었어요."
류승룡은 "자신을 어떤 틀에 가두는 것을 항상 경계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특정 장르나 배역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작품을 선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독 저만 그런 건 아닙니다. 배우들이 다 그렇잖아요. 특정 장르를 선호하거나 '나는 주연만 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배우는 없다고 봅니다. 손님의 경우도 장르에 매료돼 한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잘 녹여냈다는 점에서 끌렸죠."
류승룡에게 극중 두 가지 신에 대한 느낌을 물었다.
하나는 가위로 코털을 다듬던 우룡이 마음에 둔 마을 사람 미숙(천우희)을 본 뒤, 더 큰 가위를 들고 진지하게 수염을 다듬는 척하는 장면이다. 이에 대해 류승룡은 "몹시 괴로웠던 김광태 김독님의 유머인데, 재미 없었다"며 크게 웃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도 안 웃겼지만, 조금 투박한 듯한 정서가 김 감독님의 미덕입니다. (웃음) 지금 생각해 보면 영화의 배경인 1950년대에는 있을 수 있는 남녀간의 감정 같기도 하네요."
나머지 신은 극의 반전을 가져오는, 우룡이 아들과 이별하는 슬픔 감정을 영화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낸 장면이다. 이 신에 대해 류승룡은 "신선했다. '와! 대단하다'는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류승룡에게 '대중에게 어떠한 배우로 각인되고 싶은지'를 묻자 "지금까지 해 온 대로 연기 인생을 묵묵하게 걷는 것 말고 무엇이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연기가 좋아 고등학교 때 연극반에 들어갔고, 연극과가 있는 대학에 들어가 졸업한 뒤 극단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배우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던 시절도 있었죠. 그 즈음 같은 학교 출신인 장진 감독과 함께 연극을 했고, 그가 영화 연출도 겸하고 있었기에 저 역시 자연스레 영화와도 인연을 맺었죠."
"연극은 현장에서 찰나에 오는 소중한 느낌이 있어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느낌이죠.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를 기록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저를 흥분시키고 진심을 갖고 다가갈 수 있도록 신중하게 만들고, 도전의식을 갖게 합니다. 배움터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류승룡은 스스로를 "좋은 시대에 영화를 하고 있는 행복한 배우"라고 표현했다.
"1980년대 영화 산업은 3S 정책의 하나로서 '뽕' '애마부인' '산딸기' 등 에로 영화가 선봉에 있었잖아요. 영화에 진출하면 속된 말로 '딴따라'라고 격하시키는 인식도 컸고요. 그래서 그때는 배우로서 연극을 하는 게 당연했죠. 그러다가 1990년대 작가주의 감독님들이 들어오시면서 자연스레 연극 배우들이 영화로 흡수될 수 있었다고 봐요."
결국 한국영화가 르네상스를 맞이하면서 연극하는 배우들이 영화를 안할 이유가 없게 된 환경 덕에 자신이 자연스레 영화로 진출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한국 영화계는 소재의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간직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하고 확대됐다고 봅니다. 그 덕에 개인적으로 작품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제 최선의 연기를 전달할 수 있는 영화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커요. 지금 제가 영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한 이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