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승리 직후인 지난 2012년 12월 26일 당선인 신분으로 전경련보다 중소기업중앙회를 먼저 찾은 뒤 한 대기업 고위 관계자가 한 말이다.
당시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은 박근혜 정부가 향후 어떤 경제정책을 펼지에 대해 예의주시하며 정보를 모으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대선기간 논란도 있었지만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고 역대 당선인 가운데 최초로 중소기업중앙회를 전경련에 앞서 찾은 것을 두고 대기업들은 바싹 긴장했다.
◇ 재벌총수 구속, 경제민주화법 통과…'채찍'든 朴
박 대통령이 수차례 걸쳐 문화산업에 있어서 대기업의 횡포 사례로 지목했던 CJ 이재현 회장 역시 횡령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이와함께 징벌적 손해배상제 확대(하도급법), 일감 몰아주기 규제(공정거래법), 가맹점주 권리 강화(가맹사업법), 부당특약 금지(하도급법), 신규 순환출자 금지(공정거래법) 등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들이 취임 첫 해인 지난 2013년 줄줄이 국회를 통과했다.
박 대통령 취임 이후 비록 '경제민주화'라는 용어는 슬그머니 종적을 감췄지만 대신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화두를 던지며 한동안 대기업, 특히 재벌에게 '채찍'을 든 것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이듬해 터진 '세월호 참사'로 경기가 급속히 위축되고 이로 인한 민심이반이 심각해지면서 박 대통령도 슬그머니 대기업에 대한 채찍을 거두고 '경제살리기'라는 명분으로 '당근'을 손에 들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각종 회의에서 기업이 투자를 확대해 경기회복에 앞장설 것을 주문했고 각 기업들은 대규모 산업단지 투자나 창조경제혁신센터 참여 등으로 화답했다.
대기업과 각을 세우던 박 대통령도 결국은 대기업, 특히 재벌의 도움 없이는 경제살리기라는 최대의 국정운영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느낀걸까?
급기야 박 대통령은 지난 13일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살리고 국가발전과 국민대통합을 이루기 위해 사면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며 기업인을 포함한 대대적인 사면을 실시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새누리당도 "경제인과 정치인에 대해서도 국민들이 공감하는 범위 내에서 통 큰 사면을 해서 국민들이 대화합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달라고 건의 드리려고 한다(원유철 원내대표)"며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역대정권에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관계를 살펴보면 정권 초반에는 정치권력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만 후반에 접어들면서 점점 경제권력이 우위에 선다.
정권 초반에는 정권의 힘이 최고조에 달한 만큼 경제권력이 슬슬 눈치를 보지만 후반이 되면 힘이 빠지면서 경제권력의 도움 없이는 국정운영의 최대 과제인 경제살리기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에서 당하기만 하던 경제권력도 민주화 이후 정부에서 벌어진 이같은 권력 역전 현상을 잘 알고 있는 만큼 각 정권을 다루는 솜씨가 이미 달인 수준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로 역사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지자 아무나 부킹을 할수 없기로 유명한 모 재벌기업 소유 프리미엄 골프장 이용자의 연고지역이 대거 바뀌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다.
헌정 사상 가장 개혁적인 정부였던 노무현 정부조차 재벌개혁에는 결국 실패한 이유도 바로 집권 후반기 경제권력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한 김종인 전 박근혜 캠프 경제민주화추진단장이 재벌개혁을 포함한 경제구조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집권 초반에 해야한다고 강조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재벌 대기업들이 긴장한 것은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박 대통령이 집권 초기 재벌개혁에 나설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사면 대상에 대기업 총수들이 포함된다면 이는 단순히 박 대통령이 사면에 대한 원칙을 번복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재벌 대기업으로 대표되는 경제권력과의 밀월이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벌 대기업이 박근혜 정부 초기 상황을 회상하며 당시의 우려가 결국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