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저기 떠돌다 거하게 한판 놀고 또 다른 곳으로 향하는 정처없는 발걸음. 그에게는 여느 놀이패처럼 신명나는 자취가 묻어 있었다. 결국 스스로 멍석을 깔았고, 한판 잘 놀았다.
영화 '스물'로 충무로의 주목받는 신예가 된 이병헌 감독의 이야기다.
그의 첫 시작은 시나리오 작가였다. 이 감독은 당시의 생활을 '고달픈' 기억으로 떠올렸다.
"시나리오는 돈이 안돼요. 정말 잘 벌어야 대기업 초봉 정도죠. 1년에 몇 작품을 못하고, 인센티브도 없으니까요. 글을 쓰다보면 연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생겨요. 이건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 그 때부터 고생길 시작이에요."
영화 '과속스캔들', '써니', '타짜-신의 손', '오늘의 연애'. 쟁쟁한 영화 시나리오가 모두 그의 손을 거친만큼, 각색과 각본 내공이 상당하다. 그 덕분인지 영화 속 대사는 하나같이 입에 착착 감기면서 맛이 뛰어나다. 돌이켜보면 될성부른 감독은 떡잎부터 달랐던 셈이다.
"옛날에 쓴 시나리오를 보면 투자가 안될 만해요. 워낙에 못 써서요. 또 그 때와 투자 코드가 다르기도 하고요. 강형철 감독님과 작업하면서 나도 저런 호흡과 리듬감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 분은 대중적인 호흡이 좋은데 그걸 타고 났거든요. (각색은) 제가 쓴 게 아니라 도움을 줬던 거예요. 쓰다보면 감독님 대사가 제 대사같고 비슷한 지점이 있어요. 저희끼리 배틀하면서 대사 주고받고 그랬어요."
'스물'의 초고는 10년 전 나왔다. 당시 그는 습작에 몰입해, 3년 동안 시나리오 열 작품을 썼다.
"코미디라는 장르를 제가 좋아하고, 청춘 이야기와 코미디가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어요. 초고는 10년 전에 썼던 거라, 정말 생각없이 접근했죠. 그 때는 그냥 닥치는대로 습작을 많이 해서 3년 새 시나리오를 10개나 썼어요. 그 중에서 5개가 팔려서 알뜰하게 써먹었고요. 제작된 것도 '스물' 포함에서 세 작품이네요."
"'스물'은 완전히 제 영화였죠. 힘들기도 했지만 재미도 많이 느꼈어요. 잘 놀 수 있는 멍석을 제가 깔아서 대사로 놀아야 하거든요. 글로는 엄청나게 잘 놀았어요. 전형적인 플롯의 이야기는 아니어서 낯설음에 대한 부분은 포기했어요. 이야기가 매끄럽지 못할 거라는 예상이 있었는데 뎍시 조금 그렇더라고요. 방법을 100% 못 찾은 거죠."
관람등급은 15세 관람가였지만 현실감 넘치는 19금 '병맛' 대사는 '스물'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러나 이 감독은 그것도 약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남자들의 '섹드립'과 음담패설은 훨씬 심해요. 그걸 귀엽고 위트있게 풀어낸 것이고, 현실은 더럽습니다. (웃음) 19세로 갔으면 더러운 걸 보여드릴 수도 있는데 15세 관람가의 밝은 청춘 영화니까 영화적으로 엄청 눌렀죠."
청춘에도 남자와 여자가 있다면, '스물'은 청춘 남자들의 이야기다. 그는 여자 캐릭터를 영화의 중심에 끌어오지는 않았다.
"쓰면서도 그런 생각은 했어요. 남자 세 명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에 대해서요. 그런데 그걸 너무 신경쓰면 제가 거짓말 하는 게 티가 날 거 같더라고요. 아예 생각도 하지 말자. 그냥 남자만 생각하자. 괜히 어설프게 (여자 캐릭터를) 생각했다가 거짓말하면 티난다. 그래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신경쓰지는 않았어요. 그게 더 솔직하니까요."
아직 신인감독인 그에게 여자 캐릭터는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여자 캐릭터를 다루는 것이 힘들어요. 잘 모르기도 하고요. 자꾸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저도 왕가위가 되고 싶기는 한데, 탐구하고 있어요."
최근 트렌드가 된 'B급 정서'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킹스맨'을 영화관에 가서 봤는데 사람들 머리가 터지는 것을 불꽃놀이로 표현했을 때 감동받았어요. 바로 이거라고 소리지를 뻔했죠. 환장하면서 봤어요. 사실 '킹스맨'이나 '스물'이나 '병맛' 스타일처럼 꾸미니까 그런 거지 굉장히 어렵지 않은 보편적 정서이고 원초적인 쾌감이라고 생각해요. 어찌보면 진부할 수 있는 것을 재밌고 새롭게 꾸민거죠."
"영화적으로도 편식을 해요. 편하고 진지한 영화를 잘 못하고, 공포영화나 잔인한 영화 잘 못봐요. 삭신이 쑤셔도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장르를 하죠. 안되는 건 어쩔 수가 없나봐요. 노력해봤자 눈도 못 쓰는데요. 천만 관객이 넘을 것 같은 부러운 영화는 영화관에서 안 봐요. 800만 까지는 보는 것 같아요."
'스물' 이전까지 그는 독립영화를 연출해왔다. 펜이 아닌 메가폰을 쥐게 됐던 그 순간들은 이 감독에게 어떻게 남아있을까.
"독립영화를 하면서 생활고를 심하게 겪었어요. 제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고 싶다는 욕심은 물론 있어요. 그렇지만 함부로 하면 안되는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빚을 지게 되거든요. 그건 어떻게 해서든지 갚으면 되긴 하죠."
특유의 '말맛'으로 호평받았던 영화 '힘내세요, 병헌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산이 5천만 원에서 6천만 원 정도 들어갔는데 그 돈을 아직 주지 못했어요. 그런 것들이 굉장히 신경쓰이고, 미안하고, 다시는 못할 것 같고 그래요. 최소한의 지급을 하면서 촬영하는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쉽게 생각하고 접근은 못할 것 같아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이 감독은 영화계의 이 같은 시장 구분 속에서 중간자적 입장에 놓여 있다.
"영화판이 웃긴 게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시장이 별개로 나뉘어져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저 같은 경우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거죠. 제가 지금 안착한 지점은 어딜까, 안착을 못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요. 독립영화에서는 상업영화로 갈 사람, 상업영화에서는 독립영화하는 사람 아니냐는 시선이 있었죠."
독립영화든 상업영화든 그는 언제나 관객과의 소통을 중심에 두고 있다.
"저는 독립영화를 하면서도 일반 관객들의 정서와 영화의 정서를 멀게 가져가지는 않았어요. 관객에 대한 욕심이 좀 있어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기 때문에 영화하는 거니까 최대한 노력해왔죠. 현실감있는 느와르 장르도 해보고 싶어요. 멋은 있는데 싸움은 막싸움인거죠."